19 한국 문학 136

박설호: (2) 흙의 시학. 송용구의 생태시

3. 凸: 신유물론에 관한 학문적 논의는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 확장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凹: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오늘날 시인과 예술가에게 요청되는 것은 유기물과 무기물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일 것입니다. 어쩌면 애니미즘의 시각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겠지요. 이를테면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그리고 밤하늘을 은은하게 밝히는 달은 더 이상 술 취한 이태백 시인의 이른바 음풍농월의 객체 내지는 미적 대상으로 파악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아름답든 추하든 간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생동하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凸: 오늘날 예술은 주어진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음으로써 사물의 존귀함을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야말로 오늘날 작가와 예술가들이 연속적으로 고수해야 하는 예술적 아..

19 한국 문학 2023.06.28

박설호: (1) 흙의 시학. 송용구의 생태시

“(...) 꽃잎에 앉아 있는/ 맑은 물방울 속에서/ 사람의 눈망을을 본다// (...) 바람의 숨결 속에서/ 기쁨을 머금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다// 다사로운 저녁노을 속에서/ 연민을 가득 품은/ 사람의 얼굴이 비쳐 나온다” )송용구: 「사람을 닮았다」 일부) 1. 凸: 흔히 사람들은 21세기를 “인류세”라고 규정합니다. 이 말은 충적세의 종말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물질 이후의 생태계 파괴, 기후 위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생존하는 80여억 명의 인간은 이기적으로 수미일관 자연환경을 훼손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물질과 자연의 의미, 인간 중심적인 사고와 성장의 문제를 추적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논의 다음으로 송용구 시인의 생태시 몇 편을 논평해보려고 합니다. 凹: 중요한 ..

19 한국 문학 2023.06.21

(명시 소개) 문창길의 "메꽃"

메꽃 1 문창길 밭뿌리에서 그녀의 세상은 넓다 언덕을 넘는 바람이 그녀와 함께 옷을 벗는다 메마른 핏줄을 따라 칼칼한 목구멍을 삼키는 그녀 시든 꽃술을 감추는 혓잎 끝으로 연분홍 시절을 뒤척이며 무심한 꽃대궁을 키운다 ................... 메꽃 2 가슴이 시큰거려 온다 굼실굼실 더듬어 올수록 무슨 살맛을 알았는지 뻔질나게 드나드는 들개미는 헐어빠진 가랭이 사이로 성긴 발길이 분주하다 하혈이 흐르는 세상 좀 도 아름답게 살기 위하여 낮게 엎드려 꿈꾸는 동구 밖 암캐 같은 꽃님이 분홍옷 벗고 거친 숨 몰아 쉴 때마다 움켜진 흙 한 줌... 실뿌리 같은 주먹 손으로 부끄러운 속살을 감추지 못하는 슬픈 꽃잎 하나 묻고 있다 * 실린 곳: 문창길, 철길이 희망하는 것은, 들꽃 2001. 93 - 9..

19 한국 문학 2023.06.11

(명시 소개) 이정주 시집: 홍등

시인은 수십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자신의 기억과 갈망의 편린을 시구 속에 담아 왔습니다. 시인은 어느 상황을 포착하고,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것을 서술합니다. (그러나 행과 행 사이에 숨어 있는 처절한 감정의 여운이 은밀히 드러날 때 나는 놀라운 시적 페이소스에 감복하곤 했습니다.) 상황 속에는 수많은 체험들이 마구 뒤엉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은 현재의 상황일 수도 있고, 과거의 기억의 편린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 홍등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삿짐을 싣고 트럭이 지나간다. 점 보는 집이 지나간다. 얼굴 찢긴 후보들이 지나간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화투를 치는 여자들이 지나간다. 붉은 등 아래 담배를 물고 서 있는 여자도 지나간다. 붉은 등이 그립던 날들과 엥겔스가 옳다고 ..

19 한국 문학 2023.06.06

(명시 소개) (2) 의로운 작가에 대한 기억. 박태일의 시 「두 딸을 앞세우고」

(앞에서 계속됩니다.) 살아 한 번도 집을 지니지 못한 일이 무슨 자랑이라는 눈빛이시지만 일찍부터 너른 마당에 고방에 그대 한 커다란 집이었느니 밀양 사람 다 알지 밀양 땅 좁아 밀양강 줄기는 다시 한 번 용두목에서 꺾였던 것을 밀양강 없이 살아온 그대 밀양이 언제 기억했던가 그래 그대마저 그대를 기억했던가 세월 흘렀다고 시절 흘렀다고 이제는 늙어 희어 고요히 입 다무시나 먼 산 돌길 단풍단풍 구르는 날 두 딸을 앞세우고 찬찬히 찬찬 걷는 그대 뒤 따르면 영남루 대바람 소리 가슴을 찬다. 너: 박태일 시인의 문체에는 조금이라도 가식적인 면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나: 시집 『옥비의 달』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대신에 시적 상상 내지 주제상의 심층성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고 할까요? 시인이 과연 언..

19 한국 문학 2023.05.26

(명시 소개) (1) 의로운 작가에 대한 기억. 박태일의 시 「두 딸을 앞세우고」

너: 시인, 고은의 『만인보 (万人譜)』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 4월 19일이면/ 해마다/ 그들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무덤 저만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무덤 다섯/ 무연고 묘지/ 누구의 자식일지 모를/ 그 혁명의 거리에서/ 쓰러진/ 이름 없는 젊은이의 무덤 다섯// 바로 그 무덤 속의 젊은이를/ 그의 양자로 삼아/ 해마다/ 향과 초/ 떡과 소주를 가지고 와/ 제사지내는 사람이 있다// 표문태 (...)” 나: 네. 고은의 시구를 읽으면, 표문태가 어떠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민주화 운동의 영웅들을 혼자 기리는 분이 바로 작가 표문태 (1914 - 2007)였습니다, 쉰에 가까운 그에게는 20대의 다섯 청년들은 아들과 다름이 없..

19 한국 문학 2023.05.26

(명시 소개) 서로박: (2) 최영철의 시 "길" (해설)

(앞에서 계속됩니다.) 행여 묵직한 주머니를 넉넉한 여비로 생각지 말게나 그 바람에 바삐 가야 할 길 얼마나 멀고 무거워졌겠는가 凹: 5행과 6행에서 갑자기 시적 화자가 등장합니다. 凸: 네, 시인이 직접 독자에게 무언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실 인간은 모두 태어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객일 수 있어요. 사람들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 내려서 휴식을 취하거나 먹고 마십니다. 우리의 휴식은 어쩌면 고속도로를 지나치다 잠시 들르는 휴게소에서의 시간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凹: 아니면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사이의 대비라고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머니”가 묵직한 사람과 가벼운 사람들은 제각기 씀씀이가 다르니까요. 凸: 좋은 지적이네요.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원하든 원치..

19 한국 문학 2023.04.18

(명시 소개) 서로박: (1) 최영철의 시 "길" (해설)

凹: 오늘은 최근에 간행된 최영철의 시집 『멸종 미안족』(문학연대 2021)을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시작품 가운데 왜 「길」을 선택하셨는지요? 凸: 일순간 어떤 섬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길” 아니면 도(道)를 지적해주는 자극이라고 할까요? 작품은 인간의 삶 그리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성찰하려는 독자들에게 자극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凹: 그것은 무엇이지요? 凸: 시를 해석하면, 본의 아니게 시구를 해부해야 합니다. 최영철 시인의 작품들은 어떤 성찰과 깨달음을 요청할 뿐, 시 분석을 요구하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행간을 읽고 그 여백을 채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분석을 자제하고, 행간의 여백을 채워나가는 식으로 작품을 읽어야 할..

19 한국 문학 2023.04.18

(명시 소개) 최영철의 두 편의 시

길 최영철 인생이 달디달 때 술맛은 쓰고 인생이 쓰디쓸 때 술맛은 달았네 어느새 사랑에 취한 이에게 모든 길은 파묻혀 보이지 않아도 이윽고 사랑을 놓친 이에게 천지사방 모든 길이 망망대해였네 행여 묵직한 주머니를 넉넉한 여비로 생각지 말게나 그 바람에 바삐 가야 할 길 얼마나 멀고 무거워졌겠는가 먼저 길 떠난 이들이 모른 척 흘리고 간 여비가 차곡차곡 쌓여 저 멀고먼 협곡마다 반짝이고 있으니 나 이제 이 낯선 길 하나도 두렵지 않다네 ..................... 나리꽃 필 때 첫사랑의 정체는 소매치기였어 말 한 마디 없이 나와 너의 순정만 훔쳐 달아났지 나 잠깐 혼절해 있는 사이 그걸 어디 멀리 내다버린 줄 알았는데 이순(耳順) 어느 맑은 날 처음 수줍음 그대로 돌아 왔네 최영철 시집: 멸종 ..

19 한국 문학 2023.04.13

(명시 소개) 문창길의 시: '산족마을 동승 신쀼의식을 보며'

문창길 시인의 명시 "산족마을 동승 신쀼의식을 보며"를 인용합니다. 조만간 해설을 올려놓겠습니다. ............................ 3000미터 고산지대 외딴 산간마을 나의 어린 친구가 속세를 떠나 단기출가를 한다 절 마당에서 동무들과 대나무 공 세팍타크로를 차거나 말고삐를 잡고 풀밭을 찾아다니던 코코 아웅 짧지만 긴 불가의 세계는 높은 산 저 안개밭보다 무궁한 고행을 어린 도반에게 수행케 하리라 뜻도 다 헤아리지 못할 불경을 외우게 하고 붉은 단지를 안고 마을로 내려가 탁발승이 되라 하고 그러다 뜨거운 햇볕 내리쬐면 노승이 주는 샨스타일 얼음과자를 받아 빨면서 맨발의 학승이 되기도 할 것이다 코코 아웅 내일이면 스님으로 불러야 한다 그러다 열흘 후면 다시 속세의 어린 친구로 돌아올 것..

19 한국 문학 2023.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