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136

(명시 소개) 전홍준의 시, "금정산"

"난바다를 헤쳐 온 늙은 고래 한 마리 심해에서 건져 올린 지혜를 잘게 부숴 등뼈에다 풀과 나무를 기르고 내 친구 동식이 한숨도 품어주고 막노동 김씨의 술자리에서 말씀으로 훈제한 안주가 되어주기도 하는 언제나 그대가 던져주는 아삭아삭한 꼴 때문에 사하촌의 뭇 생명들 시퍼런 작두날 같은 세상에 베이고도 아직도 미간을 펴고 사는 것이다." (전홍준: 흔적, 전망 2020, 59쪽.) 나: 금정산이 고래로 비유되고 있군요. 그것도 “난바다를 헤쳐 온 늙은 고래”라고 말입니다. 이로써 시인의 섬망 속에는 바다와 땅이 뒤집힌 채 투영되는 것일까요? 너: 산이 고래라면, 인간은 거대한 생명체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작은 난쟁이 릴리푸트와 같을까요? 바다가 늙은 고래에게 험난한 장소였다면, 땅은 우리에게 “시퍼런 작두..

19 한국 문학 2023.03.02

(명시 소개) (3) 사랑과 평화를 위한 진혼곡. 문창길의 시 「지돌이할머니를 추모하며」

(앞에서 계속됩니다.) B: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할 게 있습니다. 일본군인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한 사람도 자신의 과거의 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양심적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본군인 가운데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여성을 능욕한 다음에 살해한 범죄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습니다. 기이하지 않습니까? A: 기이하다기 보다는, 그것은 우리의 소름을 돋게 하는 집단적 망각입니다. 가령 전후 시대의 독일을 생각해 보세요. 유대인들에게 해악을 끼쳤던 독일 사람들은 수치심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과거의 죄는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은 독일인 자신의 감정을 차단하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박설호: 호모 아만스. 치유를 위한 문학 사회심리학, 울력 2017, 116쪽 이..

19 한국 문학 2023.02.22

(명시 소개) (2) 사랑과 평화를 위한 진혼곡. 문창길의 시 「지돌이할머니를 추모하며」

(앞에서 계속됩니다.) B: 시인은 자신의 “어머니 같은 혼을 이제야 맘 놓고 훠이훠이” 휘날릴 할머니를 떠나보내 드리려고 합니다. A: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치욕과 수모를 겪고, 오랫동안 비탄과 자학으로 삶을 이어왔지만, 그래도 말년에는 자그마한 평온을 누렸습니다. 그렇기에 시적 자아는 지돌이할머니에게 이러한 평온과 작은 기쁨을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는 “짝사랑 같은 마음” 그리고 “아리랑 같은 어깨춤”도 포함됩니다. B: 뒤이어 시인은 동병상련의 친구들을 소환해내는군요. A: 네, 할머니들은 함께 지내면서 서로 우정을 나누었지요. 시인은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할머니들의 특징을 하나씩 열거합니다. “자분자분한 귓속말”, “그렁그렁한 타박거림”, “맛깔 나는 춤 맵씨”, “섹시한 그림솜씨”, “조용..

19 한국 문학 2023.02.22

(명시 소개) (1) 사랑과 평화를 위한 진혼곡. 문창길의 시 「지돌이할머니를 추모하며」

문창길 시인의 시평을 다시 한번 정리하여 올립니다. 양해 부탁드리면서 OTL ..................... B: 오늘은 연대하는 민족시인 문창길의 시 「지돌이할머니를 추모하며」를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시집 『북국독립서신』(2019. 들꽃세상)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A: 문창길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철길이 희망하는 것은』(들꽃 2002) 이후에 17년 후에 간행된 귀중한 시 모음집입니다. 시인은 평화, 상생 그리고 통일이라는 거대하고도 필연적 과업에 집중적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북국독립서신』은 민족의 아픔과 한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B: 시집의 전반부에는 일본군에게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은 할머니들에 관한 증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

19 한국 문학 2023.02.22

(명시 소개) 윤동주의 시,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어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너: 아름다운 시로군요. 어째서 선생님은 윤동주의 시 가운데에서 이 작품을 선정했는지요? 나: 모든 시는 우리에게 기억의 퍼즐을 안겨줍니다. 기억은 여러 가지 편린의 상..

19 한국 문학 2023.02.06

(명시 소개)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 (2) 이정주의 시세계

(앞에서 계속됩니다.) 4. 이정주는 『현대시학』 2007년도 7월호에 최근작들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시인은 중의적 표현 기법 내지 복합적인 장면 배열 등을 지양하고, 어떤 사소하지만, 생략될 수 없는 관점을 집요하게 투시한다. 가령 「러브레터」에서 시인은 어느 노동자의 일상을 마치 카메라의 렌즈 속처럼 들여다본다. 인간의 존재는 과학 기술에 의해서 장악되고, 인간이 행하던 모든 일은 이제 기계에 의해서 영위될 뿐이다. 최근작에서 시인은 유연한 시각을 견지하고, 약간의 체념적인 톤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예술적으로 포착하려는 의지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필자는 최근작 10편 가운데 「물가로 갈 것인가 도서관으로 갈 것인가」를 가장 관심 있게 읽었다. 물가에서 “숭어”와 “새”가 죽임의 두려움에..

19 한국 문학 2023.01.30

(명시 소개)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 (1) 이정주의 시세계

1. 독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다른 공간에서 다시 태어나는 행위이다.” 마르크에 의하면 또 다른, 가능한 공간에 대한 열망이 결국 화가로 하여금 붓을 들게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어째서 이정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일까? 가장 훌륭한 공간에서 머물면서 지고의 행복을 느끼려는 욕구야 말로 시인으로 하여금 창작에 몰두하게 하는 것일까? 2. 흔히 사람들은 이정주의 시가 초현실주의적 실험 정신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이는 틀리지 않지만, 그 자체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정주의 시 속에는 과거의 특정한 정신 사조와 비교할 수 없는, 어떤 독특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독특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

19 한국 문학 2023.01.30

(명시 소개) 김명기의 시, "청량리". 고통이 안쓰럽다 못해 신비하게 느껴질 뿐이다.

김명기 시인의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을 구해서 완독하였다. 김명기 시인이 어떤 분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나는 모른다. 알지도 모르면서, 오로지 시편에 의존하여 시인의 시 세계를 탐색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 처사인가. 빙산 일각으로서의 시편들 – 나열된 언어의 배후에는 얼마나 육중하고 무거운 서러움이 숨어 있을까. 시인은 중장비 기사직을 그만두고 유기견 구조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버려진 개들이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 그의 시각은 낯선 장소로 향하고 있다. 김 시인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물들을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투시한다. 그곳은 주로 시골의 「아랫집」이고, “강변”이며,「황지」이고,「유기 동물 보호소」 아니면, 「폐사지」이다. 그 밖에 우리를..

19 한국 문학 2023.01.25

(명시 소개) 차주일의 시: "혀의 내장과 그 거리"

혀의 내장과 그 거리 차주일 여자가 엄지를 물고 펄펄 뛴다. 뚝배기에 박혀 있던 마포 설렁탕 다섯 글자와 아 뜨거, 쯤으로 들리는 삼십년은 족히 묵었을 월남 말 세 음절 바닥에 깨어져 있다 이곳에서 사라진 소리들 지구 한쪽에서 천둥으로 나겠다 나뒹군 내장과 선지 덩어리들 사이에서 혀 한 점이 바닥을 핥는다 서울과 하노이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혀와 내장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혓바닥을 진동시켜 낸 월남여자의 황소 울음이 흑백 가족사진 한 장을 내 고막에 인화한다. 사진은 두려운 눈빛만큼 어두워진다 주인 할머니가 혀와 내장을 쓸어 담고 마포 걸레로 그 거리를 지운다 월남여자의 울음소리가 인화지처럼 마른다 할머니가 설렁탕 한 그릇을 쟁반 없이 들고 온다 펄펄 끓는 탕 속에 엄지 한마디 잠겨 있다 탕 속의 혀가 ..

19 한국 문학 2023.01.11

김시습: 짚신 신고 발길 닿는대로

김시습의 시비는 수락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세상의 곤궁함 그리고 후안무치한 세조의 폭정에 항거하며, 평생 죽은 사람처럼 숨어 살았다. 더러운 세상, 살아 무엇하는가? 하고 푸념하면서... 살아 죽은 목숨이다. 기개 있던 여섯 분은 죽어 살아있는데, 아, 나는 살아 죽어 있다. 그래도 후세인들은 뒤늦게 그의 시를 접하며, 생육신의 어떤 기개를 읽게 된다. 오늘날은 어떠한 시대인가? 과연 후안무치한 시정잡배들이, 오만한 졸부들이 사통팔달 돌아다니며, 자신의 힘을 남용하며 활개치는 시대 아닌가? .................................................... 終日芒鞋信脚行 一山行盡一山靑 心非有像奚形役 道本無名豈假成 宿霧未晞山鳥語 春風不盡野花明 短筇歸去千峯靜 翠壁亂煙生晩晴..

19 한국 문학 2022.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