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흐 117

박설호: (4) '아직 아님'의 변증법

(앞에서 계속됩니다.) 17. “아직 아님”은 갈망의 심리학, 즉 종결되지 않는, 기도하는 갈구 행위로 이해된다. 블로흐는 역사와 관련하여 “초험성Transzendenz”이라는 개념 대신에 “바깥 영역Exterritorialität”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역사 자체와 비교될 수 있는 공간 개념으로서, “역사적 과정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Bloch, TE: 373). 이미 언급했듯이 “그냥 사는 순간의 어두움”은 갈구하는 의식을 심화시켜서, 어떤 소외 없는 삶의 길을 새롭게 찾게 하며, 우리의 마음에 희망을 가득 채워 줍니다. 어두움에 사로잡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전제 조건을 성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한 성취는 개인의 삶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이룩될 수 없으며, 오..

27 Bloch 저술 2024.06.29

서로박: (4)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앞에서 계속됩니다.) 친애하는 C, 튼실하고 멋진 여왕벌에는 언제나 수많은 수벌들이 모이듯이, 탁월한 명작을 집필한 작가 주변에는 요상한, 혹은 훌륭한 모방 작가들이 들끓기 마련입니다. 가령 괴테가 파우스트 제 1부를 일차적으로 완성한 시점은 1797년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괴테는 작품을 끊임없이 개작하였습니다. 그후 35년 후에 파우스트 제 2부가 완성되었으니 필생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9세기 초에 어느 젊은이가 자신이 파우스트 제 2부를 집필했다고 말하면서, 원고를 들고 괴테를 찾아왔습니다. 이때 괴테는 몹시 분개하면서, 이 세상에 파우스트를 완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가 있다면, 그는 오로지 자신이라고 일갈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괴테는 훌륭한 작가임에는 분명하지만, 인간으로서..

34 이탈스파냐 2024.06.27

박설호: (2) 갈망의 힘. 에른스트 블로흐의 "흔적들"

(앞에서 계속됩니다.) 『흔적들』의 글들은 그 자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흔적이라는 단어는 자구적으로는 발자국, 바퀴 자국 등으로 이해되며, 단서 내지는 암호 등의 의미를 지닌다. 주어진 현실 속에는 우리의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흔적이 마치 어떤 놀라운 비밀처럼 숨어 있다. 블로흐는 에드거 알란 포, 코난 도일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처럼 이러한 암호를 세심하게 주시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블로흐의 짤막한 글이 드러내려는 것은 무엇일까? 오로지 인간과 세계에 도사린 변화의 효모 그리고 갈망의 방어기제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흔적들』이 블로흐의 희망 철학 사상을 압축한 미세화인 근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역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로 블로흐의 글들은 블로흐 ..

28 Bloch 흔적들 2024.06.26

박설호: (1) '아직 아님'의 변증법

“변모만큼 지속적인 것도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아직 아님”의 정서 속에는 최상의 행복에 대한 기대감이 자리하고 있다. (필자) 1. “아직 아님”에 도사린 네 가지 발전적 특징: “아직 아님”이라는 블로흐의 철학 용어는 무엇보다도 가능성에 관한 형이상학의 인식론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개념은 이전의 서양 철학에서 심도 넘치게 논의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블로흐는 “아직 아님”을 통해서 고전적 형이상학의 네 가지 기본적인 논의를 이어 나가려고 합니다. 첫째로 “아직 아님”은 가능성의 개념에서 자리하는 발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것은 “추구streben”의 개념 속에 도사린 발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셋째로 “아직 아님”은 “부정성 Negativität”의 개념 속에 도사린..

27 Bloch 저술 2024.06.20

서로박: (2)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

(앞에서 계속됩니다.) 2. 파국 앞에서의 진보에 관한 사고 미리 말씀드리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닙니다. 첫째로 그의 ”역사 철학 테제“ 속에는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사안에 관여하지만, 어떤 무엇을 선택하지 않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는 유대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 에 대한 망설임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글인지 모릅니다. 소논문에서는 우유부단함과 숙고의 흔적이 너무 강해서, 저자의 명징한 견해를 도출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둘째로 역사 철학 테제는 파시즘의 폭력과의 상관성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모든 사회에 통용되는 보편적 역사 철학의 사고라고 확장될 수는 없습니다. 작품에서는 신학 그리고 역사적 유물론의 관계, 역사주의, 특히 사민당 사람들의 진보적..

25 문학 이론 2024.04.29

서로박: 마네의 '풀밭 위의 아침 식사' 해설

사람들은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을 좋아하여, 그의 삶의 행적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마다 마네는 “꽃밭에 가보세요. 그곳에 가면 나의 삶이 다 보일 것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행적에 관해 묻는 리포터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의 저작물을 구해서 보세요. 그 속에는 나의 삶이 용해되어 있습니다.” 각설, 마네는 자신의 사적인 삶에 관해서 언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랑 그리고 이와 결부된 프라이버시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네에게는 커다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던 네덜란드 출신의 수잔네 렌호프를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리의 저명한 판사였던 마네의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피..

11 조형 예술 2024.04.14

박설호: 블로흐의 "재기억" 비판

1. 재기억 이론이란 무엇입니까? 블로흐의 "주체와 객체. 헤겔에 대한 주해 Subjekt - Objekt. Erlaeuterung zu Hegel"는 헤겔 사상과 재 기억에 관해 논하고 있습니다. 기억이란그리스어 단어에 의하면 “ανάμνηση”라고 하는데 , 플라톤 이래로 인식이론의 토대가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리란 과거에 존재한 불변의 사실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파악하려면 인간은 다시 기억 속에 그것을 소환해내면 족하다고 합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진리를 다시 소환해내는 일이 바로 재-기억이라는 행위라고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고 속에 탈레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게 한 전매특허로서의 특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문은 ..

30 bloch 대화 2023.11.14

서로박: 블로흐와 자게

정치학자 리하르트 자게는 유토피아의 의향으로서의 란다우어, 만하임 그리고 에른스트 블로흐의 입장을 처음부터 배격하고, 토마스 모어의 고전적 유토피아를 유토피아 개념의 핵심 사항으로 수용하고 있다. 1991년 『신시대의 정치적 유토피아 Politische Utopien der Neuzeit』이후로 4권에 이르는 『유토피아 프로필 Utopische Profile』을 발표해 왔다. 물론 자게는 방대한 서적을 통하여 자신의 확고한 견해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어느 정도 유연한 입장을 표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게는 오랫동안 한 가지 근본적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유토피아의 의향의 개념으로서 천년왕국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그의 많은 논문과 연구서에..

27 Bloch 저술 2023.11.06

블로흐: 빵 그리고 유희

“빵 그리고 유희를panem et circenses”이라는 표현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에 의해서 유래된 것이다. 로마의 황제들은 과도한 세금을 거둔 다음에 인민에게 그 일부를 나누어주었다. 어리석은 인민들은 자신이 헌납한 재산의 일부를 돌려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감지덕지하는 마음으로 결투 게임 내지 서커스를 즐기곤 하였다. 순식간에 가난의 수렁에 빠진 한 사내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허름한 방으로 이주해야 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그 다음날 거리로 나왔을 때 사내는 화들짝 놀란다. 자신의 소유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원래 우리는 하찮은 물건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을 때,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뒤늦게 깨닫는다. 사내는 지금까지 편안하게 책장, 책상, 램프..

28 Bloch 흔적들 2023.10.16

박설호: (1) 새로운 물질 이론 그 의미와 방향

“북극에 봄이 오면/ 잠자던 곰의/ 가스가 피어오른다.” (Ben Rawlence)” 1. 들어가는 말 새로운 물질 이론은 과학 기술에 대한 인간의 관계, 자연과 환경에 관한 학제적인 이론의 흐름에서 태동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협소한 의미를 담고 있는 ”신유물론“ 대신에, ”새로운 물질 이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물질에 관한 사고는 오랜 시간에 걸쳐 관념 이론 속에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마르크스주의 신봉자들조차도 물질과 정신을 서로 분리하여 별개의 사항으로 파악하기에 이릅니다. 가령 블라디미르 I. 레닌Wladimir I. Lenin은 “어리석은 유물론보다는 영특한 관념 이론이 영특한 물질 이론에 더욱 근친해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여기서 물질의 개념은 정신과..

2 나의 잡글 2023.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