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대 문헌 70

서로박: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친애하는 Y, 오늘은 로마의 시성으로 알려져 있는 베르길리우스 (Vergil, BC. 70 - BC. 19)의 불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다루어보기로 합시다. 베르길리우스는 죽기 직전 12년에 걸쳐 이 작품에 매진하였고,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바로 그 날까지 책상 위에는 원고와 펜이 얹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이네이스”는 위대한 미완성 작품입니다. 친애하는 Y, 나는 미완성 작품을 몹시 사랑합니다. 미완성은 어떤 가능성을 담보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의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천재성에 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다만 대리석에서 다만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낸 일밖에 없습니다.”이라고 말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완성 작품을 유독 싫어했습니다. 그토록 심혈..

37 고대 문헌 2025.01.16

서로박: 아이스킬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를 소재로 하여 집필된 고대 작품은 아이스킬로스의 것밖에 없다. 대부분 작가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소재를 중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Ρρομήθευς δεσμότης)”의 집필 연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제우스와 그의 자매들은 아버지 크로노스 그리고 타이탄들과 오랫동안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신들과도 계속 투쟁해야 했다. 이때 젊은 타이탄 가운데 하나인 프로메테우스는 처음에는 타이탄들을 편들다가, 나중에 자신의 입장을 바꾼다. 말하자면 프로메테우스는 미리 파악하여 제우스의 승리를 예언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는 영리한 충고로 제우스의 환심을 산다. 문제는 경쟁자들을 재정리할 때 발생한다. 제우스는 인간들을 모조리 파멸시키..

37 고대 문헌 2025.01.08

서로박: (2)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앞에서 계속됩니다.) 6. 비극의 내적 개연성과 일치성: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위해서 내적 개연성과 일치성을 요구한다. 비극은 전통적 사항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신화적 내용과 절묘하게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호라티우스의 중개로 근대 시학의 전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작품 내 행위의 특징으로서 세부적 사항을 기술하고 있다. 가령 엉클림의 “복잡화 Desis”, “해결 Lyris”, “작품 속의 돌발적 전환 Peripetie”, “정체성 확인 내지는 재인식 Anagnorisis” 그리고 “파국”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드라마의 이질적인 부분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프롤로그, 시작되는 “합창 Parodos” 에피소드, “(서서 노래하는) 합창 S..

37 고대 문헌 2024.12.27

서로박: (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요약해서 올려 놓습니다. 문헌의 내용과 의향을 정리한 것이니, "Exposé"의 성격이 강합니다. 예술론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완결된 작품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B.C. 384 - B.C. 322)의 󰡔시 예술에 관하여 Peri poietikes󰡕 (일명 "시학")는 기원전 335년경에 집필되었다. 이 문헌이 완결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두 가지 사항으로 설명된다. 첫째로 『시학』에는 시학 제 2권이 빠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은 중세에 사라졌다가, 1481년 베니스에서 발췌본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누군가 아라비아어의 원전을 발췌하여 부분만 라틴어로 번역했다. 1498년 베니..

37 고대 문헌 2024.12.27

서로박: (2)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참과 진리는 때로는 거짓과 궤변에 의해 거부당하기도 한다. 세 번째 막에서는 두 교사 사이의 엄청나게 폭력적이고 거친 논쟁이 벌어집니다. 두 명의 후보자는 파이디피데스의 능력과 관점을 설득하려고 노력합니다. "올바름을 옹호하는 자“는 자기 훈련을 위한 교육이라는 전통적인 이상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거짓을 옹호하는 자”는 이른바 현대적 의미에서 궤변의 중요성 그리고 견강부회(牽強附会)의 사고방식을 내세웁니다. 거짓과 속임수를 통해서 즐거운 생활방식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종국에는 “올바름을 옹호하는 자”는 는 패배를 선언합니다. 말하자면 거짓을 옹호하는 자의 놀랍고도 교활한 말재간 덕분에 거짓과 속임수가 승리를 구가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구름의 합창단은 스트렙시아..

37 고대 문헌 2024.11.30

서로박: (1)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1. 낙선작이 더 위대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νεφελεί」은 기원전 423년 아테네에서 개최된 디오니소스 축제 당시에 처음으로 공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에서 수백 년을 이어 공연되었는데, 이 가운데에 시리아 출신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필로니데스Philonides의 공연이 가장 훌륭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필로니데스는 자신의 연출을 위해서 아리스토파네스의 「벌σφήκες」, 「개구리βάτραχοι」 그리고 두 편의 유실된 작품을 심도 넘치게 연구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은 디오니소스 축제에 당선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크라티노스Kratinos의 「술병πυτίνη」가 일등 작품으로, 아메입시아스Ameipsias의 ..

37 고대 문헌 2024.11.30

서로박: (5)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론'

(앞에서 계속됩니다.) 29. 완전한 숫자, 6: 아우구스티누스는 수학의 영역에 등장하는 자연수에 대해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가령, 아라비아 숫자인 1 μονο, 2 δι, 3 τρι, 4 τετρα는 그 자체 점, 선, 넓이, 높이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네 숫자는 실질적으로 자연의 공간을 가리킵니다. 점, 선, 넓이 그리고 높이는 삼차원의 공간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제각기 “흙”, “물”, “공기” 그리고 “하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Horn: 405). 재미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불” 대신에 “하늘”을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그는 사원소 이론을 간접적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뒤이어 출현하는 것은 “5 πεντα”입니다. 이것은 창조주와 자연이 서로 조우하는 과도기적인 영역을..

37 고대 문헌 2024.09.24

서로박: (4)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론'

(앞에서 계속됩니다.) 23.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 놀라운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관입니다. 그는 현세에 주어진 시간을 여섯 개의 시기로 나누고 있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의 시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시점으로부터 최후의 심판 일까지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출현이야말로 역사의 정점이며, 가장 중심이 되는 시점이라고 합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의 계시로 이해되어온 내용은 예수에 의해서 비로소 유효성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계시로 이어져온 천년왕국의 이상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행적으로 인하여 실제 현실에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항은 교회가 과연 어떻게 변해나가는가? 하는 물음과도 관련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서인 「다니엘」을 하나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

37 고대 문헌 2024.09.23

서로뱍: (3)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론'

(앞에서 계속됩니다.) 15.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 철학적 발전 단계: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 철학적 발전 단계에 의하면 유년기는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며, 소년기는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에, 청년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에, 성년기는 다윗의 성장으로부터 바빌로니아 유수 시기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시기는 다윗의 마지막 생애로부터 예수의 탄생까지, 그때부터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신의 나라 그리고 그 붕괴의 역사에 입각한 것입니다. “지상의 국가”는 대홍수에 의해서 멸망하고, “신의 국가”는 노아와 그의 아들에 의해서 생명력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에 이르러서는 사악한 국가의 저주가 새롭게 득세합니다. 헤브라이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은 다시 왕이 타고..

37 고대 문헌 2024.09.22

서로박: (2)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론'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아우구스티누스의 삶 (4): 387년 부활절의 밤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밀라노에서 기독교인으로 세례식을 올립니다. 그후에 그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북아프리카로 이주할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388년 말에야 비로소 그는 카르타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도착 직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여생을 기독교에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91년에 그는 히포로 떠나 그곳의 사원에 머물게 됩니다. 394년 아우구스티누스는 발레리우스로부터 주교직을 하사 받아서 죽을 때까지 사제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기도와 함께 청빈한 삶을 살아가면서, 저술 작업에 열중하였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기독교의 사상에 첨예한 특성을 부여하는 일이었습..

37 고대 문헌 2024.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