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122

(명시 소개) 최두석의 시 '산목련이 백목련에게'

산목련이 백목련에게 최두석 너는 잎도 없이 꽃망울 터트리지 수백 수천의 꽃눈 붓끝처럼 세우고 추운 겨울을 견디면서 벼르고 벼르다가 온몸으로 봄볕을 느끼며 한꺼번에 수백 수천의 꽃망울 터트리지 사람들은 너의 환한 꽃그늘 아래 서서 마음껏 봄날을 즐기곤 하지 하지만 나는 떨군 꽃잎이 쓰레기가 되어 발길에 밟히는 게 싫어 산 속에 산다네 햇볕 가릴 만큼 가득 잎을 펼친 다음에 꽃은 한 송이씩 차례로 피운다네 사람들의 번거로운 눈길에서 벗어나 아는 이만 맡게 되는 향내는 한층 그윽하고 깊다네. .................... 최두석 시집: 두루미의 잠 , 문학과 지성 2023. 필자는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1. 아름다운 시골 처녀가 서치라이트 불빛 아래에서 박수 세례를 받는 여배우에게 드리는 ..

19 한국 문학 2023.09.05

(명시 소개) 김용민의 시 '가끔'

가끔 김용민 가끔 달이 되고 싶은 때가 있다 유리창 사람들의 눈동자 속 비칠 수 있는 곳이면 모두 제 모습 나누어주고도 아직 남아 빛날 수 있는 달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 하늘이고 싶을 때가 있다 미워지는 것들에서 눈감고 싶을 때 작은 도랑물 위 비 지나간 웅덩이 여름날 무성이는 앞새들 위에 안길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가만히 내려앉아 들어가 있는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하늘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은 나무이고 싶기도 하다 잠시 서 있음에도 어지러워 휘청일 때면 하루 종일 말없이 서서 비바람 눈보라 그 팔로 안아 들이는 그러면서 햇빛 받아 무수히 반짝거리는 나무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정말은 햇빛이 되고 싶다 바람 못 가는 유리창 너머 지붕으로 막혀 보이지 않는 방안에까지 어루만질 ..

19 한국 문학 2023.07.26

(명시 소개) 서로박: (2) 권경업의 시 '꽃은 상처입니다'

(앞에서 계속됩니다.) 너: 이번에는 두 번째 관점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나: 지리산의 산벚나무의 꽃은 핍박당하며 살아갔던 한국 여성들의 한 (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너: 산벚나무의 꽃은 다른 벚나무의 꽃과는 달리 잎과 함께 핀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산벚나무 꽃은 푸른 잎사귀 사이에서 하얀, 혹은 분홍의 미소를 아름답게 드러내지요. 나: 그렇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벚나무의 60% 이상이 몽고 시대에 팔만대장경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화살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산벚나무의 나무토막을 모으고 다듬는 사람들은 바로 이조시대의 여성들이었지요. 그들은 전쟁 속에서 고난과 핍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여성들이 외국 군인들의 욕정의 도구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지요. 너: 이러한 역사적 한이 바로 벚..

19 한국 문학 2023.07.24

(명시 소개) 서로박: (1) 권경업의 시 '꽃은 상처입니다'

너: 권경업 시인의 시 「꽃은 상처입니다」를 자세히 논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시집 『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전망 2013)에 실려 있습니다. 권 시인의 발표한 수많은 작품 가운데 왜 선생님은 이 작품을 선택하였나요? 나: 이 작품은 한마디로 생명체의 사랑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 내지 평화의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시인에 의하면 “신비적 합일unio mystica”, 다시 말해서 암수의 결합으로 귀결되는데, 이 과정에서 생명체에게 순간적 희열과 오랜 아픔을 안겨준다고 합니다. 행복은 순간적이고, 삶의 고통은 연속적으로 이어지지요. 너: 그래서 시인은 “사랑을 쉽게 말하지” 말라고 호소하는군요. 나: 사랑은 “섬뜩하게 낯선 장검을/ 칼집에서 뽑는 소리”와 관련되기 때문이..

19 한국 문학 2023.07.24

박설호: (4) 흙의 시학. 송용구의 생태시

7. 凹: 문제는 인간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동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예단하지 못합니다. 凸: 그렇지만 우리는 최소한 종말의 여러 가지 징후를 감지할 수 있지요? 凹: 사람들은 사회적 갈등으로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윤석열 정권과 노조가 싸우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눈앞의 문제로 서로 투쟁하는 동안에, 세상은 서서히 물에 잠기고 있습니다. 凸: 그렇다면 우리의 자손, 노아는 그의 방주에 과연 무엇을 실어야 할까요? 凹: 그것은 물과 식량 그리고 풀과 나무, 몇몇 반려동물일지 모르지요. 로빈손 크루소의 “프라이데이”는 어쩌면 치유와 위안을 가져다주는 페티시즘의 물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지녀야 ..

19 한국 문학 2023.06.30

박설호: (3) 흙의 시학. 송용구의 생태시

5. 凹: 이는 물에 관한 천문학적 측면과 관련되는데, 솔직히 나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연과학의 방식으로 추론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뫼비우스의 띠”, 혹은 “클라인의 작은 병”을 생각해 보세요. 뫼비우스의 띠에는 안과 밖의 구분이 없습니다. 클라인씨의 병의 주둥이는 다시 병 안으로 들어가 있지요. 凸: 그러니까 우리가 거주하는 세상은 삼차원의 공간을 벗어나서,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제한된 영역일 수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凹: 그렇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인터스텔라』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영화인데, 주인공은 우주선을 타고 토성 뒷면에 있는 “웜홀Wormhole”을 통해서 은하계로 탈출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5차원의 공간을 활용하여 어른이 된 딸이 사는 영역으..

19 한국 문학 2023.06.30

박설호: (2) 흙의 시학. 송용구의 생태시

3. 凸: 신유물론에 관한 학문적 논의는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 확장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凹: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오늘날 시인과 예술가에게 요청되는 것은 유기물과 무기물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일 것입니다. 어쩌면 애니미즘의 시각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겠지요. 이를테면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그리고 밤하늘을 은은하게 밝히는 달은 더 이상 술 취한 이태백 시인의 이른바 음풍농월의 객체 내지는 미적 대상으로 파악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아름답든 추하든 간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생동하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凸: 오늘날 예술은 주어진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음으로써 사물의 존귀함을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야말로 오늘날 작가와 예술가들이 연속적으로 고수해야 하는 예술적 아..

19 한국 문학 2023.06.28

박설호: (1) 흙의 시학. 송용구의 생태시

“(...) 꽃잎에 앉아 있는/ 맑은 물방울 속에서/ 사람의 눈망을을 본다// (...) 바람의 숨결 속에서/ 기쁨을 머금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다// 다사로운 저녁노을 속에서/ 연민을 가득 품은/ 사람의 얼굴이 비쳐 나온다” )송용구: 「사람을 닮았다」 일부) 1. 凸: 흔히 사람들은 21세기를 “인류세”라고 규정합니다. 이 말은 충적세의 종말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물질 이후의 생태계 파괴, 기후 위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생존하는 80여억 명의 인간은 이기적으로 수미일관 자연환경을 훼손해 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물질과 자연의 의미, 인간 중심적인 사고와 성장의 문제를 추적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논의 다음으로 송용구 시인의 생태시 몇 편을 논평해보려고 합니다. 凹: 중요한 ..

19 한국 문학 2023.06.21

(명시 소개) 문창길의 "메꽃"

메꽃 1 문창길 밭뿌리에서 그녀의 세상은 넓다 언덕을 넘는 바람이 그녀와 함께 옷을 벗는다 메마른 핏줄을 따라 칼칼한 목구멍을 삼키는 그녀 시든 꽃술을 감추는 혓잎 끝으로 연분홍 시절을 뒤척이며 무심한 꽃대궁을 키운다 ................... 메꽃 2 가슴이 시큰거려 온다 굼실굼실 더듬어 올수록 무슨 살맛을 알았는지 뻔질나게 드나드는 들개미는 헐어빠진 가랭이 사이로 성긴 발길이 분주하다 하혈이 흐르는 세상 좀 도 아름답게 살기 위하여 낮게 엎드려 꿈꾸는 동구 밖 암캐 같은 꽃님이 분홍옷 벗고 거친 숨 몰아 쉴 때마다 움켜진 흙 한 줌... 실뿌리 같은 주먹 손으로 부끄러운 속살을 감추지 못하는 슬픈 꽃잎 하나 묻고 있다 * 실린 곳: 문창길, 철길이 희망하는 것은, 들꽃 2001. 93 - 9..

19 한국 문학 2023.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