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143

(명시 소개) 윤경재의 시, 쑥부쟁이

쑥부쟁이윤경재 제 이름 모르는 채 들국화라 홀대하다연보라 뽐내거나 노란 꿈 비교 않네바람에 흔들거려도속정 깊은 누이여 불쟁이 아버지와 동생들 헌신 봉양무심한 나무꾼과 노루도 감동하고죽음도 차마 못하여들꽃으로 피웠네 벼랑을 넘어서는 여여한 징검다리못다 부른 사랑의 숨결을 되살렸어괜찮아 누군가의 꽃깊은 가을 사르네

19 한국 문학 2024.09.29

송용구의 시 '바람 소리'

바람 소리- 어느 의사의 고백 -송용구 앞 못 보는 자의 눈이 되고앉은뱅이의 다리가 되는그런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너의 눈과 너의 다리는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나의 혀끝에전사(戰士)처럼 칼을 들이대던스무 살적 바람소리여백일몽을 가위누르던서슬 퍼런 바람 소리여나를 잊으라 나를 용서하라 온 하루 빈 들녁에 퍼붓던겨울 소나기 잠잠해지면나는 쓸쓸히 저무는 강가에 꿇어 앉아잊혀진 연서 (戀書)의 언약 같은마른 억새 잎으로 입술을 내리치며눈시울 붉은 달빛 속에저주 받은 승냥이의 울음을꺼이꺼이 게워내고 있는가   송용구 시인이 어떠한 계기로 이 시를 집필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젊은 날 "공부해서 남 주어야 한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그래, 한 인간으로 태어나, 이웃과 사회 그리고 나라에 도움을 주는 삶을 살..

19 한국 문학 2024.09.28

김지하의 시, '말씀'

말씀                              김지하 하는 일 없이 안하는 일 없으시고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출옥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비록 사람 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바위틈 사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는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치 말고먼 곳에라도 바람 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출전: 김지하 시집 애린, 실천문학사 1986.

19 한국 문학 2024.09.26

풍요 속 인간 관계 복원을 고민하다. 전홍준의 시, '아요'

나: 전홍준 시인은 2020년 말에 시선집 『흔적』을 간행했습니다.너: 그는 “간결하고 투박한 문체로 작품을 창조하는 고향 시인”입니다. 시편들은 홍준 시인의 활달한 성격과 정교한 투시력이 결합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홍준 시인은 언어로 조작하는 수많은 시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압축을 선호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나: 그렇지만 시적 주제가 독자에게 수월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너: 홍준 시인은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적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정독해야 합니다.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유형의 시 대신에 수사와 수식으로 수놓은 작위적인 시를 선호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전홍준의 시적 가치가 지금까지 제대로 수용되지 않..

19 한국 문학 2024.09.24

(명시 소개) 김선우의 시 '입설단비'

입설단비 (立雪斷譬)김선루 2조(二祖) 혜가는 눈 속에서 자기 팔뚝을 잘라 바치며달마에게 도(道) 공부하기를 청했다는데나는 무슨 그리 독한 비원도 이미 없고단지 조금 고적한 아침의 그림자를 원할 뿐아름다운 것들의 슬픔을 아는 사람을 만나밤 깊도록 겨울 숲 작은 움막에서생나뭇가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며그저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우거나 비우며 다음날 아침이면 자기 팔뚝을 잘라 들고 선정한 눈빛의 나무 하나 찾아서그가 흘린 피로 따뜻하게 녹아 있는동그라한 아침의 그림자 속으로 지빠귀 한 마리종종 걸어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싶을 뿐작은 새의 부리가 붉게 물들어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물고 날아가는 것을고적하게 바라보고 싶은 뿐 그리하여 어쩌면 나도 꼭 저 나무처럼파묻힐 듯 어느 흰눈 오시는 날마다 않고 흰눈을 맞..

19 한국 문학 2024.09.03

(명시 소개) 전홍준의 시, '좀'

좀전홍준 수평선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철벅거리며 살아서 어느덧, 불혹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교활한 좀이 되어세상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살아가는지금도 어떤 꿈이 있을까 돌아보면 개기름 자르르한 허리와황금으로 걸신들린 해골박불어터진 국수가락처럼 질척거리는 인생이피래미새끼 한 마리 살지못하는탁한 연못으로 누워있다 남에겐 날을 세우고 내 허물엔 관대하여동무 하나 없는 적막한 처소에서석쇠에 나를 굽고 있는가. 凸: 오늘은 전홍준 시인의 "좀"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나는 노새처럼 늙어간다"에 실려 있습니다.凹: 왜 하필이면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요?凸: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전홍준의 디스토피아의 역설적 시정신과 관련됩니다.凹: 어쩌면 작품 "좀"은 시대와 삶에 대한 시인의 소신이..

19 한국 문학 2024.07.19

서로박: (2)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 이정주의 시세계

(앞에서 계속됩니다.) 4.이정주는 『현대시학』 2007년도 7월호에 최근작들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시인은 중의적 표현 기법 내지 복합적인 장면 배열 등을 지양하고, 어떤 사소하지만, 생략될 수 없는 관점을 집요하게 투시한다. 가령 「러브레터」에서 시인은 어느 노동자의 일상을 마치 카메라의 렌즈 속처럼 들여다본다. 인간의 존재는 과학 기술에 의해서 장악되고, 인간이 행하던 모든 일은 이제 기계에 의해서 영위될 뿐이다. 최근작에서 시인은 유연한 시각을 견지하고, 약간의 체념적인 톤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예술적으로 포착하려는 의지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필자는 최근작 10편 가운데 「물가로 갈 것인가 도서관으로 갈 것인가」를 가장 관심 있게 읽었다. 물가에서 “숭어”와 “새”가 죽임의 두려움에 ..

19 한국 문학 2024.07.15

서로박: (1)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 이정주의 시세계

1.독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는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다른 공간에서 다시 태어나는 행위이다.” 마르크에 의하면 또 다른, 가능한 공간에 대한 열망이 결국 화가로 하여금 붓을 들게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어째서 이정주의 시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일까? 가장 훌륭한 공간에서 머물면서 지고의 행복을 느끼려는 욕구야 말로 시인으로 하여금 창작에 몰두하게 하는 것일까? 2.흔히 사람들은 이정주의 시가 초현실주의적 실험 정신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이는 틀리지 않지만, 그 자체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정주의 시 속에는 과거의 특정한 정신 사조와 비교할 수 없는, 어떤 독특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독특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이정..

19 한국 문학 2024.07.15

(명시 소개) 이달희의 시 '낙동강 1'

낙동강 1.                                                이달희 大寒 날얼어붙은 낙동강을홀로 건너가시던 할머니,명주수건으로 두른사천년의그 忍從의  시린 추위. 싸르륵 싸르륵마른 갈맡을 헤치는 회리바람을 지나모래 바람이 불꽃처럼 확확 타오르는강변을 지나 大寒 날얼어붙은 닉동강을홀로 건너가시던 할머니,호오 호오, 언 손 불어주시던사천년의그 면면한 사랑. 하얀 약첩을 펼치면숙지황익모초人蔘누렇게 한지에 밴 그 내음새,자주 앓던 자손을 언제나 걱정하시던사천년의그 빛바랜 애환 낙동강 2 섬돌 밑에 떨어진 낡은 고무신 한켤레 흐느끼고 있네.장독 뒤에 숨은 이 빠진 옹기그릇 하나 흐느끼고 있네.돌담 아래 넘어진 손때 묻은 박달절구 하나 흐느끼고 있네.장롱 속에 주인 잃은 구리비녀..

19 한국 문학 2024.07.04

(명시 소개) 김해화의 시, '어미는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로'

어미는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로김해화 어린 동자승을 산 속 암자에 두고 스님이 양식을 구하려 내려왔다가큰 눈에 길이 막혀 올라가지 못했답니다.눈이 녹아 길이 열린 뒤에 서둘러 올라가보니스님을 기다리던 모습 그대로 동자승은 죽어 있더랍니다.그 무덤에서 피어났다는 슬픈 동자꽃 - 큰 눈처럼 갑자기 물려와서 길을 막아버린 IMF길은 열렸지만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아비는 공사장을 떠돌고어미는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로 세상 밖으로 날아갔답니다. 그래서 그래서 꽃 한 송이도 남지 않은 우리 세상오늘은 그냥 비나 내립니다. ............ 실린 곳: 김해화 시집, "꽃 편지", 삶이 보이는 창 2005, 118쪽.  동자꽃

19 한국 문학 2024.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