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서로박: (2) 최영철의 시 "길" (해설)

필자 (匹子) 2023. 4. 18. 11:32

(앞에서 계속됩니다.)

 

행여 묵직한 주머니를 넉넉한 여비로 생각지 말게나

그 바람에 바삐 가야 할 길 얼마나 멀고 무거워졌겠는가

 

凹: 5행과 6행에서 갑자기 시적 화자가 등장합니다.

凸: 네, 시인이 직접 독자에게 무언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실 인간은 모두 태어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객일 수 있어요. 사람들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 내려서 휴식을 취하거나 먹고 마십니다. 우리의 휴식은 어쩌면 고속도로를 지나치다 잠시 들르는 휴게소에서의 시간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凹: 아니면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사이의 대비라고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머니”가 묵직한 사람과 가벼운 사람들은 제각기 씀씀이가 다르니까요.

 

凸: 좋은 지적이네요.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제각기 크고 작은 재화를 얻게 되지요. 혹자는 마치 도토리로 채운 다람쥐의 뺨처럼 많은 돈을 소지하는가 하면, 혹자는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없을 수도 있습니다.

凹: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려고 허겁지겁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들은 묵직한 주머니의 무거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살지요.

凸: 그렇습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사람들은 어째서 인생을 그렇게 바삐 가야할 길로 생각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지요, 공수래공수거라고 고대 서양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수의 (壽衣)에는 호주머니가 없다고 말입니다.

 

먼저 길 떠난 이들이 모른 척 흘리고 간 여비가 차곡차곡 쌓여

저 멀고먼 협곡마다 반짝이고 있으니

나 이제 이 낯선 길 하나도 두렵지 않다네

 

凹: 그렇게 생각하시면 우리에게 많은 액수의 “여비”가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군요.

凸: 동의합니다. 무거운 재화는 길손의 등짐을 무겁게 할 뿐입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종말과 같습니다. 돈방석에 파묻힌 채 살던 재벌도 모든 것을 남기고 그냥 죽을 뿐이지요.

凹: 그런데 시구 하나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른 척 흘리고 간 여비” 말입니다.

凸: 나는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치타 한 마리가 떠올랐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빠른 치타는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한 다음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버려두어야 했습니다. 그곳에 사자들이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온갖 재화를 축적하지만, 결국에는 타인이 그것을 차지하곤 하지요.

 

凹: 일부러 흘렸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어쨌든 사람들은 “협곡”을 지나치며, 이전 세대가 남긴 최소한의 양식을 얻을 수 있겠지요. 마지막 구절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요?

凸: 시인은 자청해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삶이 전혀 두렵지 않다고 술회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도 언급한 바 있지만, 자연 속에는 검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원은 충분하지요. 그렇지만 사치와 낭비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자연은 결코 충분하지 못한 처녀지에 불과합니다.

凹: 여비가 협곡마다 반짝이고 있으니, 무얼 두려워하랴. 이러한 태도 속에서 우리는 시인의 달관을 엿볼 수 있네요.

凸: 네, 그게 바로 독일 시인 볼프 비어만이 강조한 “고통 속으로 잠입하려는 희열Heiterkeit ins Leiden”에 해당합니다. 대부분 일반 사람들이 돈과 건강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반면에, 예술가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자청해서 선택하는 자들이지요.

 

凹: 나는 최영철 시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추측하건대 처음부터 자청해서 가난을 선택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언젠가 최영철 시인은 산문집 『변방의 즐거움』(도요 2014)에서 휴가 여행이란 시인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편안하게 해외여행을 즐길 만큼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영철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통은 흥얼거리며 삶의 진창을 건너야 할 시인에게 주어진 두둑한 노잣돈이다.” (46)

凹: 나도 그 산문집을 읽었습니다. 시인은 병원에서 의식을 잃었을 때 난생처음으로 진정한 휴가를 즐겼다고 합니다.

 

凸: 시인의 시 쓰기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이 들 때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졌지요. 시 한편의 완성은 놀라운 탁마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마치 마르틴 루터가 성서의 단어 하나를 찾으려고 여자들이 머무는 우물가에 서성거리다가 봉변을 당했듯이, 최 시인 역시 적절한 시어 하나를 찾으려고 골몰하다가 그만 쓰러졌을 것 같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 혹은 사랑과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동안, 최 시인은 책을 읽고 생각하며, 시구를 찾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고통 속으로 잠입하려는 희열이 아닐까요?

凹: 말씀 감사합니다.

 

인생이 달디달 때 술맛은 쓰고

인생이 쓰디쓸 때 술맛은 달았네

어느새 사랑에 취한 이에게 모든 길은 파묻혀 보이지 않아도

이윽고 사랑을 놓친 이에게 천지사방 모든 길이 망망대해였네

행여 묵직한 주머니를 넉넉한 여비로 생각하지 말게나

그 바람에 바삐 가야 할 길 얼마나 멀고 무거워졌겠는가

먼저 길 떠난 이들이 모른 척 흘리고 간 여비가 차곡차곡 쌓여

저 멀고먼 협곡마다 반짝이고 있으니

나 이제 이 낯선 길 하나도 두렵지 않다네

 

최영철: 길, 실린 곳: 최영철 시집 『멸종 미안족』(문학연대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