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이정주 시집: 홍등

필자 (匹子) 2023. 6. 6. 09:46

시인은 수십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자신의 기억과 갈망의 편린을 시구 속에 담아 왔습니다. 시인은 어느 상황을 포착하고,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것을 서술합니다. (그러나 행과 행 사이에 숨어 있는 처절한 감정의 여운이 은밀히 드러날 때 나는 놀라운 시적 페이소스에 감복하곤 했습니다.) 상황 속에는 수많은 체험들이 마구 뒤엉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은 현재의 상황일 수도 있고, 과거의 기억의 편린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 홍등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삿짐을 싣고 트럭이 지나간다. 점 보는 집이 지나간다. 얼굴 찢긴 후보들이 지나간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화투를 치는 여자들이 지나간다. 붉은 등 아래 담배를 물고 서 있는 여자도 지나간다. 붉은 등이 그립던 날들과 엥겔스가 옳다고 생각한 날들이 지나간다. 보리밥집과 나무문 만드는 집이 지나간다. 이윽고, 지나간 것들이 다시 돌아온다. 나무문 만드는 집 나무문이 닫힌다. 보리밥은 식어 있다. 길가에 나와 있던 여자가 없어졌다. 붉은 얼굴의 여자들을 누이라고 생각한 날들이 돌아온다. 외등이 꺼지고 점포 안이 붉다. 술상을 보는 여자들 뒤로 숨는 엥겔스가 보인다. 나는 빈 자리에 차를 집어 넣는다. 붉은 얼굴로 졸고 있는 푸줏간 여자가 보인다."

 

붉은 등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1. 붉은 등은 청춘의 열정을 알려줍니다. 어쩌면 시인은 "붉은 얼굴의 여자들"에게서 사랑하던 누이의 얼굴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그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적 자아를 시인과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따분한 해석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젊은 군인들은 몸파는 여자들에게서 사랑을 느끼곤 합니다. 가령 빌헬름 라이히 (Wilhelm Reich)는 자전기 "청춘의 열정 Die Leidenschaft der Jugend"에서 홍등가를 방문하고, 그곳의 어느 여인에게서 사랑을 느꼈다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2. 붉은 등은 50년대 초반의 세대 사람들이 열광하고 경도했던 데모와 민주화의 열정 그리고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대감을 가리킵니다. 엥겔스가 술상 뒤로 숨는 것으로 미루어, 시인은 다음의 사항을 비판합니다. 즉 50대의 세대들이 젊은 날에 품었던 이상을 저버렸거나, 아니면 시인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꺾은 것을 겸연쩍게 여기고 있다는 게 그 비판입니다.

 

3. 붉은 등은 "홍등가"를 연상시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사랑이 결여된 (?)" 살섞기를 강요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돈 때문이지요. 시인은 돈을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정육점에도 붉은 등이 켜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육고기를 더욱 싱싱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붉은 등을 켭니다. 이를테면 벌겋게 달아오른, 한우로 둔갑한 쇠고기 덩어리는 붉은 등 아래에서 고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돈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속물적 사고를 비판하려 했는지 모릅니다.

 

각설, 이정주 시인은 이 모든 것을 특정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아니 벌어졌던 상황들을 초시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서술되고 있지만, 시인의 기억 속에서 다시 거꾸로 연상됩니다. "이윽고, 지나간 것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시구가 이를 반증합니다.

 

이정주 시인처럼 한 가지 사물 내지 장소를 치밀하게 투시하고,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의 사건을 뒤엉키게 묘사해내는 시인은 참으로 드뭅니다. 어째서 이정주와 같은 개성 있는 시인이 문학상 하나를 수상하지 못했을까요? 이 자리를 빌어서 시집 홍등의 간행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의 시적 성취에 대해 문학상에 갈음하는 찬사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