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loch 흔적들 39

박설호: (2) 갈망의 힘. 에른스트 블로흐의 "흔적들"

(앞에서 계속됩니다.) 『흔적들』의 글들은 그 자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흔적이라는 단어는 자구적으로는 발자국, 바퀴 자국 등으로 이해되며, 단서 내지는 암호 등의 의미를 지닌다. 주어진 현실 속에는 우리의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흔적이 마치 어떤 놀라운 비밀처럼 숨어 있다. 블로흐는 에드거 알란 포, 코난 도일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처럼 이러한 암호를 세심하게 주시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블로흐의 짤막한 글이 드러내려는 것은 무엇일까? 오로지 인간과 세계에 도사린 변화의 효모 그리고 갈망의 방어기제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흔적들』이 블로흐의 희망 철학 사상을 압축한 미세화인 근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역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로 블로흐의 글들은 블로흐 ..

28 Bloch 흔적들 2024.06.26

박설호: (1) 갈망의 힘, 에른스트 블로흐의 "흔적들"

“기대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갈구하지 않는 자는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한다.” (헤라클레이토스) ...................... 에른스트 블로흐의 『흔적들』은 1930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몇몇 글들이 첨가되었다. 글들의 배경이 20세기 초의 프로이센 시대라는 점에서 독자들은 과거의 문헌에 해당한다고 치부하기 쉽다. 물론 『흔적들』은 집필의 현실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Einbahnstraße』 (1928)그리고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한줌의 도덕Minima moralia』 (1951) 등과 궤를 같이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흔적들』에 실린, 일견 사소한 이야기의 주제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을만한 함의를 안겨준다. 그것은 짤막한 소품 모음집이라는..

28 Bloch 흔적들 2024.06.26

블로흐: 서로 다른 욕구

누군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개 한 마리는 말 한 마리와 친구가 되었다. 개는 최상의 뼈다귀를 먹지 않고 친구를 위해서 남겨 놓았다. 말은 친구에게 주려고 건초를 그릇에 담아두었다. 말하자면 각자가 친구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두 동물은 자신의 배를 든든하게 채우지 못했다. 이러한 경우는 가까운 사람, 혹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출현하는 안타까운 오해를 그대로 시사하고 있다. 이는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성격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거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느슨할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따금 일반적으로 그리고 통상적인 측면에서 선한 마음을 타인에게 전할 경우가 발생한다. 이 경우 자그마한 선을 베푸는 것이 오히려 낫다. 우리는..

28 Bloch 흔적들 2024.05.15

블로흐: (3) 행운의 손

(앞에서 계속됩니다.) 이야기 속에는 불을 밝히는 촛대가 등장한다. 그것은 올바르게 빛을 밝히고 있다. 랍비는 어떠한 지양 (止揚)의 문제를 논하지 않는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이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자신에 관해서도, 촛대에 관해서도 아무런 말을 들려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랍비는 상인을 미혹에 빠뜨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놀라운 무엇을 깨닫게 해주지도 않는다. 랍비는 막연히 주위에서 발견한 촛대 하나를 마치 “행운의 징표”로 건네주었을 뿐이다. 얼핏 보기에 마법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그 속에는 기이할 정도로 냉정한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 침묵하는 랍비는 하나의 기적을 신봉하는 유대인 상인, 쇼텐 앞에서 거의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랍비는..

28 Bloch 흔적들 2023.11.13

블로흐: (2) 행운의 손

(앞에서 계속됩니다.) 쇼텐은 일순간 비명을 터뜨린 다음에,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절망적 상태란 바로 지금 이순간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다급한 순간 소름이 끼치고 온몸에 땀이 흘렀다. 구원의 기도를 반복해서 암송했다. 랍비가 건네준 촛대 위에는 여전히 빛이 환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왜 랍비가 촛대를 건네주었는지 깨달을 것 같았다. 말하자면 촛대는 현재 무엇을 해야 할지를 비단 상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쇼텐은 일단 죽은 친구를 관에서 꺼내어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눕혔다. 그 다음에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죽은 친구는 마치 자신이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뒤이어 그는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가, 널빤지 아래의 공간으로 자신의 몸을 숨겼다. 거의 질식할 것 같아서 가끔 ..

28 Bloch 흔적들 2023.11.13

블로흐: (1) 행운의 손

지금부터 약 백여 년 전에 독일의 마인츠에서는 쇼텐이라는 이름의 상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의 일은 자신의 적성과 거의 일치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단을 매매하며 살아가는 성실한 상인이었는데, 매년 멀리 여행을 떠나곤 하였다. 그의 행로가 조금씩 달랐던 까닭은 그가 이따금 우회로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쇼텐은 이번에는 미헬슈타트 출신의 랍비와 만나서 경건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 랍비의 근처에 머물기로 했다. 이번에 만나게 된 랍비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른바 “기적의 랍비”로 칭송되는 분이었다. 랍비의 이름은 “발셈”이었다. 사실 그는 많은 사람의 기억에 의하면 18세기 말경에 독일에서 거주한 적이 있었던 학자였다. 쇼텐은..

28 Bloch 흔적들 2023.11.13

블로흐: 빵 그리고 유희

“빵 그리고 유희를panem et circenses”이라는 표현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에 의해서 유래된 것이다. 로마의 황제들은 과도한 세금을 거둔 다음에 인민에게 그 일부를 나누어주었다. 어리석은 인민들은 자신이 헌납한 재산의 일부를 돌려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감지덕지하는 마음으로 결투 게임 내지 서커스를 즐기곤 하였다. 순식간에 가난의 수렁에 빠진 한 사내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허름한 방으로 이주해야 한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그 다음날 거리로 나왔을 때 사내는 화들짝 놀란다. 자신의 소유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원래 우리는 하찮은 물건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을 때,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뒤늦게 깨닫는다. 사내는 지금까지 편안하게 책장, 책상, 램프..

28 Bloch 흔적들 2023.10.16

블로흐: 두 개의 액자

루돌프라는 이름을 지닌 청년은 대학생이었는데, 잠시 고향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싫지만 그래도, 약혼녀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청년은 더 이상 그미에 향한 연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 청년은 부모의 집에서 식사를 마친 다음에 식탁에 혼자 앉아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기 위함이었다. 바로 이때 약혼녀는 밖에서 소리쳤다. 모두가 이미 떠났으니, 둘이서 오붓하게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청년에게는 그미와 함께 소풍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오늘만은 그냥 집에 머물고 싶었다. 처녀는 몹시 화가 난 듯이,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그렇지만 루돌프의 귀에는 문소리가 듣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어린 시..

28 Bloch 흔적들 2023.01.03

블로흐: 가난한 놈과 부유한 놈

부유한 사람들은 기꺼이 유희를 즐기려고 하며, 함께 즐기자고 가난한 사람들을 종용한다. 어느 미국인은 무척 기이한 내기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행동을 취했다. 이때 그는 함께 세계 여행을 즐길 젊은 사내 한 명을 공개적으로 채용하려고 했다. 가급적이면 건강하고, 민첩한 광부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려 했다. 지원자는 놀랍게도 10만 명이나 되었다. 지원자 가운데 젊은 사내 한 사람이 선정되었는데, 매우 잘생긴 청년이었다. 채용 조건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즉 사내는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게 먹고 마시고, 세련된 의복을 멋지게 걸치며, 자신의 몸매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가정교사 한 사람이 채용된 사내에게 세상의 법도를 가르쳤다. 가령 승마, 골프, 숙녀 앞에서 행해야..

28 Bloch 흔적들 2022.06.19

블로흐: 고결한 상

탐정소설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샤일록 홈스가 등장하는 일련의 탐정 소설을 집필하여 문학적으로 그리고 범죄심리학적으로 공헌하였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에는 인권 투쟁을 위한 고결한 용기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가령 코난 도일은 1909에 스코틀랜드 법정에 의해서 살인죄를 선고 받고 20년 이상을 억울하게 옥살이해야 했던 독일인, 오스카 슬레이터Oscar Slater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었고, 그를 무죄 석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외쳤으며, 심지어는 모든 유형의 심령학을 동원해서라도 불의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인권, 바로 그 자체의 문제였다. 오스카 슬레이터의 사건은 이전에 프랑스에서 출현한 드레퓌스 사건과 같은 정..

28 Bloch 흔적들 2022.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