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136

(명시 소개) 박미소의 시(조), "지족 바다"

경사진 밤 건너온 여자들의 생을 안고 만 마리 물고기가 반짝이며 솟구치듯 달빛에 온몸이 감겨 까무러치는 파도여 박미소: 푸른 고서를 앍다, 들꽃세상 2020, 14쪽 너: 박미소 시인의 작품 가운데에는 암송하고 싶은 것들이 참으로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일견 소품과 같이 보이는 「지족 바다」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 「지족 바다『는 짤막한 시조입니다. 짤막하다고 해서 소품으로 취급하면 곤란합니다. 단순성 속에는 놀라운 사상 감정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일견 이 작품은 밤바다에 관한 놀라운 인상을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 작품을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시가 독자에게 직관적으로 전해주는 분위기라든가 아우라가 약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살펴볼 시구들이 있어요. 예..

19 한국 문학 2022.01.26

(명시 소개) 성수자의 시, 「꽃대」

친구아버지 장례식에 갔다 돌아오는 길 밀리는 차창가로 꽃집이 보인다 꽃집 앞에 차를 멈추고 물끄러미 꽃을 바라본다 어둔 빛 금새 사라지는 환한 기분 꽃피웠던 한 생애 그만의 꽃들은 숱한 나날 속에 얼마나 진지하고 꽃다웠던가 피었던 아름다움을 알고 가는 길 기어이 꽃집 안으로 들어간다 멀쑥이 꽃대 세워 현란한 보라색 또는 순백색으로 피어난 양란이 눈부시다 “아저씨 이 꽃은 이렇게 예쁜데 잎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여요?“ “꽃대 세울려고 힘이 들어서 그래요” 그래 그냥 꽃 피는 게 아닌 혼신의 힘을 기울인 잎과 꽃대와 뿌리의 희생이 숨은 것을 잎이 힘들어하는 화분을 안고 나온다 퇴근길 도로는 체증에 시달리고 꽃대를 밀어 올리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불을 켜고 기다린다 성수자의 「꽃대」 (실린 곳:..

19 한국 문학 2022.01.12

(명시 소개) 장석의 시,「단풍」

모든 잎이 제 몸을 등불로 하여 산마다 공양을 올린다 가을을 지나가는 구름의 복부를 밝히고 죄가 쌓인 내부를 비춘다 이것이 우리 세계가 만드는 노을이다 없다면 천하고 비참함 그대로 얼어갈 테니 장석 시집: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 도서출판 강 63쪽 ................. 너: 장석 시인의 창작 욕구는 마치 활화산처럼 느껴지는 군요, 불과 6개월만에 시집 해변에 엎드려 있는 아이에게가 간행되었습니다. 모다기로 태어난 예술적 자식 -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 자신의 모든 시간을 창작에 쏟는다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군요. 분명한 것은 시인의 상상에 거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신선처럼 때로는 방금 태어난 아기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시적 대상을 서술하는 ..

19 한국 문학 2022.01.11

(명시 소개) 박태일의 시「들개 신공」

나: 오늘은 박태일의 명시 「들개 신공」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2013년 문학동네에서 간행된 시집 『달래는 몽골말로 바다』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표된 박태일의 시집 가운데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지요. 너: 일단 작품에 등장하는 몇 가지 난해한 시어를 해설해 주시지요? 나: “신공”이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 듯합니다. 첫째로. 신공神功은 기도드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흔히 가톨릭에서 묵상 신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고려해 보세요. 둘째로. 신공申供은 정성들여 소원을 비는 행위를 지칭합니다. 너: 벅뜨항, 게르, 어워, 잉걸불 등의 시어가 낯설게 다가오네요. 나: “벅뜨항”은 울란바트르의 산 이름이며, “게르”는 몽골의 이동식 집을 뜻합니다. “어워”는 몽골..

19 한국 문학 2021.12.24

(명시 소개) (4) 아홉 구름 속의 변주곡, 박미소의 "보리암 시편"

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어째서 허상이 아름답고, 실상이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허상 속에는 갈망, 즉 미래를 촉구하는 희망이 도사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로 정치적 관점에 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나: 앞에서 박미소 시인은 “그” 그리고 “나”가 살아가는 공간을 적소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좋은 곳에 사는 자는 좋은 삶을 사는 자 bene qui latuit bene vixit”이지요. 이 시구는 오비디우스의 『고독 (Tristia)』에 실려 있습니다. (Y. S. Tsybulnik. Eingängige lateinische Ausdrücke. 2003. S. 113). 시구에는 고통을 감추고 외로운 자신을 위로하려는 흔적이 역력합니다. 너: 세상은 ..

19 한국 문학 2021.12.21

(명시 소개) (3) 아홉 구름 속의 변주곡, 박미소의 "보리암 시편"

발 디딘 곳곳마다 적소 아닌 곳 있었던가? 피었다 지는 꽃들 그만한 이유 있어 혼자서 바라보는 바다 아련하고 느껍다 먼 길을 휘어감아 섬 안에서 바라본 섬 끝없이 자박이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안고 온 세상의 욕망 벼랑 끝에 세우고 밤이 깊어갈수록 숨소리 더 크게 들려 구름 속으로 사라진 한 사람 떠올리며 없는 듯 방파제에 앉아 묵시록을 읽는다 너: 박미소 시인의 「서포의 달을 만나다」의 전문입니다. 남해 시편들은 여러 가지 주제상의 측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나: 네, 그 작품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하게 해석하도록 하지요. 중요한 것은 작품 「보리암 시편」에 반영된 세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의 해석입니다. 1. 심리적 관점, 2. 정치적 관점, 3. 철학적 관점이 그것들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결..

19 한국 문학 2021.12.21

(명시 소개) (2) 아홉 구름 속의 변주곡, 박미소의 "보리암 시편"

그대 바라는 마음, 또 다른 보폭이지만 해배된 길을 안고 두 눈 뜬 산정에서 가슴에 고여 있었던 응어리를 토해낸다 흘러온 시간들이 허공 속을 돌고 있는 한 번도 품지 못한 만경창파 애저녁에 깨춤 춘 나의 모습들 급히 접어 숨기고 살아가는 이유를 그대에게 말하고 싶어 간절한 몸짓으로 노을 끝을 움켜잡아 내 안에 숨어서 사는 새를 날려 보낸다 너: 작품은 도합 3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 시인은 유배지에서 벗어나는 자유인의 모습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대”의 갈망은 분명히 “나”와는 다른 크기와 방향을 지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김만중 그리고 시적 자아 모두 원치 않는 “적소”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너: “노자묵고할배”로 알려진 김만중은 위리안치의 장소에서 벗어나는 순간..

19 한국 문학 2021.12.21

(명시 소개) (1) 아홉 구름 속의 변주곡. 박미소의 "보리암 시편"

나: 최근에 놀라운 명시 한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박미소 시인의 「보리암 시편」이라는 작품입니다. (박미소 시집: 『푸른 고서를 읽다』 (들꽃세상 2020. 15쪽). 시적 함의가 다양하고 복합적이면, 그럴수록, 작품이 전해주는 감동은 더욱더 증폭되는 법일까요? 너: 무슨 뜻이지요? 나: 주제가 다양하면, 그만큼 작품은 독자에게 폭넓은 심층적 의미를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시인 한용운, 프란츠 카프카 그리고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문학이 오늘날에도 역사성과 현대성의 관점에서 생생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그만큼 그들의 작품이 여러 가지 주제를 포괄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지요. 너: 그런가요? 그렇다면「보리암 시편」에도 문학적 주제의 다양성이 담겨 있다는 말씀인데요. 나: 한마디로 인간의 갈망과 관련..

19 한국 문학 2021.12.21

(명시 소개) 박미소의 시(조) "꽃지 노을"

한때, 나도 저처럼 붉은 적이 있었지 한 사람 아득함을 끝끝내 담지 못해 뜨겁게, 발설해버린 그런 사랑 있었지 세상의 외로움이 견딜 수 없는 날에 혼자 급히 찾아와 반성하듯 서성이며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을 지운다 박미소 시조집: 푸른 고서를 읽다, 들꽃 세상 2020, 67쪽. 박미소 시인의 시집 "푸른 고서를 읽다"를 접했습니다. 명시들이 많이 숨어 있네요. (나중에 명시들을 차례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가운데에서 "꽃지 노을"을 선택해 보았습니다. 언어를 아끼고 시적 정서를 압축할 수 있는 장르가 시조라는 사실을 재확인해주는 시집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슴속 깊은 곳에는 도저히 떨칠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날 때 수많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겸연쩍음으로 비치는 정서이..

19 한국 문학 2021.12.19

(명시 소개) 김사인의 "한국사"

오늘은 김사인 시인의 명시 한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 한국사 김사인 얼빠진 집구석에 태어나 허벅지 살만 불리다가 속절없이 저무는구나 내 새끼들도 십중팔구 행랑채나 지키다가 장작이나 패주다가 풍악이나 잡아주다가 행하 몇푼에 해해거리다 취생몽사하리라. 괴로워 때로 주리가 틀리겠지만 길은 없으리라 친구들 생각하면 눈물 난다. 빛나던 눈빛과 팔다리들 소주병 곁에서 용접기 옆에서 증권사 전광판 앞에서 엎어지고 자빠져 눈도 감지 못한 채 우리는 모두 불쏘시개. 오냐 그 누구여 너는 누구냐. 보이지 않는 어디서 무심히도 풀무질을 해대는 거냐. 똑바로 좀 보자. 네 면상을 똑 바로 보면서 울어도 울고 싶다. 죽어도 그렇게 죽고 싶다. ....................

19 한국 문학 2021.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