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136

(명시 소개) 박태일의 시 "레닌의 외투"

아침 저녁 오갈 때마다 혹 당신일까 길 건너로 지나치다 울란바타르에 머문 셋째 주인 오늘 울란바타르호텔 앞에 선 당신을 처음 만난다 옆구리에 무거운 외투를 낀 채 익은 듯했던 모습은 동상 앞쪽에 새긴 레닌 레닌 막 배우기 시작한 몽골어로 확인하며 나는 눈인사를 보낸다 레닌 당신보다 먼저 알았던 동지 카우츠키 1970년대 초반 어린 대학생 시절 나에게 그의 책 계급투쟁 복사본을 건네주었던 친구는 서독으로 흘러가 동독 문학을 배우고 독일인 아내와 돌아왔지만 그가 처음 말아주었던 대마초 매운 연기처럼 울란바타르 겨울 공기는 낮고 어둡다 그 카우츠키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잊었고 또 당신이 어떻게 그를 다루었는지 희미하지만 징키스한과 자무하가 뿌린 넓은 땅 울란바타르 붉은 영웅의 도시에 영웅으로 와서 오래 즐거..

19 한국 문학 2020.01.21

(명시 소개) 김광규의 시, "생각과 사이"

생각과 사이 김광규 시인은 오르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르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르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르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르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르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르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르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르지 관청만 생각하고 학자는 오르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19 한국 문학 2019.04.05

이은봉: 시 쓰기와 자아 찾기

아래의 글은 이은봉 시인의 시쓰기와 자아 찾기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실린 곳: 김은교 외, 유쾌한 시학 강의 아인북스 2013, 278쪽 이하. ............... "시쓰는 사람이라면 저 자신을 이렇게 수식하고 위장하는 '나'를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의 본질, 아니 '나'의 본질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시 안에서의 '나'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때의 '나'는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진실, 곧 참된 가치, 진선미를 위해 희생되는, 아니 가공되는 '나'일 수밖에 없다." 위의 글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은봉 시인에게 시인에게 시쓰기란 자아를 추구하고 자아를 절차탁마하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위의 글은 이에 대한 핵심적 부분을 인용한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다..

19 한국 문학 2018.10.13

(명시 소개) 이명기의 시, "병이 떠나는 아침"

병이 떠나는 아침 이명기 밖에서 부르는 소리, 내게서 먹고 마시고 뚱땅거리며 드러누워 기숙하던 것이 부스스 일어나 걸어나간다 병이 떠나는 아침 오래 앓은 것이 떠나는 아침, 부스스한 몰골로 문을 열듯 몸을 열고 나가 댓돌 아래서 돌아보는 저 눈빛에도 정이 들었는가, 한여름 풀밭처럼 들끓던 소란이여 가서 다신 오지 말아라 돌아누울 때마다 나는 비좁은 몸이었으니 나는 삐걱거리는 잠이었으니,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홀연히 떠나는 아침, 텅 빈 몸으로 몇 걸음 걸어가 밖을 본다 아무도 없다. 이명기: 허공을 밀고 가는 것들, 천년의 시작 2018. ........................... 회복기에 느끼는 아련함 속에서 인간은 누구든 간에 죽음의 흔적을 감지합니다. 그것은 내 몸 속에"먹고 마..

19 한국 문학 2018.04.22

(명시 소개) 최종천의 시 "파업 보름째"

최종천: 파업 보름째 우리 공돌이만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하다 말고 그대로 놓아둔 우리 배속처럼 꼬인 산소 호스와 작업 선들 널브러진 공구들은 우리에게 파업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야 구호를 외치고 하늘을 쳐다본다지만 말도 못하는 저것들은 속이 어떨까? 어둠 속에서 저마다 간절한 눈빛이다. 망치자루를 쥐어본다. 어깨가 뻐근해지면서 콧등이 시큰거린다. 희박해지는 공기와 더러워지는 물은 인간에게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최종천 시집, 고양이의 마술 2011 최종철 시인의 시를 읽으면, 내 자신은 왜 한없이 초라해지고 부끄러워지는 것일까? 최 시인은 오랫동안 노동하면서 시를 써온, 얼핏 보기에는 시인 답지 않은, 그러나 시인 중의 참 시인이다. 그의 글은 어떠한 미사여구도 허용하지 않는 가장 ..

19 한국 문학 2018.02.13

(명시 소개) 홍성란: 소풍

시조 한 편을 소개하고, 서로박 샘이 당신을 위해서 해설을 달아봅니다........................................소풍홍성란  여기서 저만치가 인생이다 저만치, 비탈 아래 가는 버스멀리 환한복사꽃 꽃 두고아무렇지 않게 곁에 자는 봉분 하나 (시조집: 바람의 머리카락, 고요아침에서)     생 (生)이 그저 아름다운 소풍으로 이어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삶은 그렇게 녹녹치 않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리라. 옛날 같으면 삼시세끼 걸르지 않는 것도 힘들었다고. 대부분 무지렁이로 태어나 빈손으로 무언가 움직이며 일해야 그저 밥 한 그릇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요즈음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금수저는 드물고, 흙수저는 많다. 그렇지만 요즈음이라고 해서 살아가는 게 쉽지는 않다...

19 한국 문학 2016.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