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140

서로박: 그 언덕에 세워진 이정주 시인의 탑 (4)

4. 임 혹은 애타게 갈구하는 장소로서의 여자 나: 그렇군요. 이와는 달리 분류된 소재는 무엇이며, 이에 해당하는 작품들로서 어떠한 것들을 들 수 있습니까? 너: 셋째로 물화된 삶과 인간 소외를 지적하는 작품들로서 「조류독감」, 「육식」, 「실종」*, 「물리치료」, 「별」이 있습니다. 앞에서 선생님은 이정주의 시를 “현실의 칼날에 의해 찢겨나간 마음의 대팻밥”으로 비유하셨지요? 그것은 이러한 작품에서 재확인되고 있습니다. 나: 이 가운데 「물리 치료」라는 작품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시적 자아는 어깨의 통증 때문에 물리 치료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통증은 물리적인 게 아니라, 심리적 아픔과 관련됩니다. (...) 하지만 미진하다 이 통증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내 팔은 다은 것을 찾고 있다. 지난 여름의..

19 한국 문학 2020.08.27

서로박: 그 언덕에 세워진 이정주 시인의 탑 (3)

3. “그대, 시 뽑는 기계” 너: 이번에 간행된 시집을 소재의 측면에서 어설프게 여덟 가지로 분류해보았습니다. 1. 기억과 관련되는 아름다움의 비밀을 추적한 작품들, 2. 실용적 가치 내지 재화만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품들, 3. 물화된 삶과 인간 소외를 지적하는 작품들, 4. 삶과 죽음에 관한 성찰을 다룬 작품들, 5. 자아의 고독 그리고 단 한 번의 삶에 관한 문제를 다룬 작품들, 6. 버림받은 귀한 존재, 혹은 소시민으로서의 시인을 다룬 작품들, 7. 시와 예술에 관한 성찰을 다룬 작품들, 8.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 이러한 분류가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나: 네. 작품에 대한 일차적 접근으로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작품이 한 가지 사항 속에 국한..

19 한국 문학 2020.08.27

서로박: 그 언덕에 세워진 이정주 시인의 탑 (2)

2. 음각과 그림자 속에 도사린 여백의 만화경 너: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라는 표현이 흥미롭군요. 나: 시인의 작품 속에는 과거의 찬란한, 혹은 끔찍한 기억으로서의 상이라든가 갈구하는 삶에 대한 갈망의 상이 현재 현실에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정주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일단 작품들을 여러 번 정독해야 합니다. 게다가 그의 시를 자구적으로 이해할 게 아니라, 시적 현실 속에 담긴 배후의 상, 다시 말해서 기억과 갈망의 상을 도출해내야 합니다. 시작품 속에 활용된 시어들에 집착하지 말고, 그 속의 여백을 고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만약 겉으로 드러난 시적 표현의 양각 뒤에 숨어 있는, 어떤 음각의 상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이정주의 시가 지향하는 바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

19 한국 문학 2020.08.27

서로박: 그 언덕에 세워진 이정주 시인의 탑 (1)

1. 기억과 갈망의 몽타주 너: 이정주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아무래도 나는 육식성이다』가 간행됩니다. 수록된 작품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나: 감히 말씀드리건대, 시집에 수록된 약 10편의 작품만큼은 어떠한 문학상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찬란한 기념비와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정주 시인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랜 시간 시작품의 창조에 매진해 왔습니다. 그는 생업을 제외하면 다른 곳에 거의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작품들은 간결한 시어 그리고 대화체 등으로 인하여 수월하게 읽혀졌습니다. 너: 시인의 시에는 현실의 맥락을 뛰어넘는 번득이는 비약이 있어요. 그리고 간간이 출현하는 기발한 착상이 독자를 놀라게 하고요. 그밖에 기억해야 할 사항은 주어진 현실에 입각한 기준과 논리에 결코 얽매..

19 한국 문학 2020.08.27

(명시 소개) 천양희의 시, "도마뱀"

도마뱀 천양희 상처보다 더 긴 꼬리는 없다. (애지. 2008년 가을호) ................ "1. 모든 상처는 도마뱀처럼 긴 꼬리를 갖고 있다. 우리 인간들의 상처는 결코 숨길 수가 없다. 2. 상처는 그 주체자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 상처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아문다. 우리 인간들의 삶은 상처 투성이의 삶이다. " (반경환: 명시감상 4, 종려나무 2009, 160쪽) 도마뱀의 꼬리가 잘려 나가듯이, 우리의 상처도 치유받지 못하고 그냥 우리의 마음에서 그냥 잘려 나간다. 삶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수많은 상처를 인지하게 한다. 그러다가 상처입은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상처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어떤 또 다른 아픔은 마치 갑자기 솟아난 버섯처럼 출현하곤 한다. 그것은 그대와 내가 살아가는 ..

19 한국 문학 2020.08.15

(명시 소개) 박태일의 시 "레닌의 외투"

아침 저녁 오갈 때마다 혹 당신일까 길 건너로 지나치다 울란바타르에 머문 셋째 주인 오늘 울란바타르호텔 앞에 선 당신을 처음 만난다 옆구리에 무거운 외투를 낀 채 익은 듯했던 모습은 동상 앞쪽에 새긴 레닌 레닌 막 배우기 시작한 몽골어로 확인하며 나는 눈인사를 보낸다 레닌 당신보다 먼저 알았던 동지 카우츠키 1970년대 초반 어린 대학생 시절 나에게 그의 책 계급투쟁 복사본을 건네주었던 친구는 서독으로 흘러가 동독 문학을 배우고 독일인 아내와 돌아왔지만 그가 처음 말아주었던 대마초 매운 연기처럼 울란바타르 겨울 공기는 낮고 어둡다 그 카우츠키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잊었고 또 당신이 어떻게 그를 다루었는지 희미하지만 징키스한과 자무하가 뿌린 넓은 땅 울란바타르 붉은 영웅의 도시에 영웅으로 와서 오래 즐거..

19 한국 문학 2020.01.21

(명시 소개) 김광규의 시, "생각과 사이"

생각과 사이 김광규 시인은 오르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르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르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르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르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르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르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르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르지 관청만 생각하고 학자는 오르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19 한국 문학 2019.04.05

이은봉: 시 쓰기와 자아 찾기

아래의 글은 이은봉 시인의 시쓰기와 자아 찾기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실린 곳: 김은교 외, 유쾌한 시학 강의 아인북스 2013, 278쪽 이하. ............... "시쓰는 사람이라면 저 자신을 이렇게 수식하고 위장하는 '나'를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삶의 본질, 아니 '나'의 본질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 시 안에서의 '나'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때의 '나'는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진실, 곧 참된 가치, 진선미를 위해 희생되는, 아니 가공되는 '나'일 수밖에 없다." 위의 글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은봉 시인에게 시인에게 시쓰기란 자아를 추구하고 자아를 절차탁마하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위의 글은 이에 대한 핵심적 부분을 인용한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다..

19 한국 문학 2018.10.13

(명시 소개) 이명기의 시, "병이 떠나는 아침"

병이 떠나는 아침 이명기 밖에서 부르는 소리, 내게서 먹고 마시고 뚱땅거리며 드러누워 기숙하던 것이 부스스 일어나 걸어나간다 병이 떠나는 아침 오래 앓은 것이 떠나는 아침, 부스스한 몰골로 문을 열듯 몸을 열고 나가 댓돌 아래서 돌아보는 저 눈빛에도 정이 들었는가, 한여름 풀밭처럼 들끓던 소란이여 가서 다신 오지 말아라 돌아누울 때마다 나는 비좁은 몸이었으니 나는 삐걱거리는 잠이었으니,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홀연히 떠나는 아침, 텅 빈 몸으로 몇 걸음 걸어가 밖을 본다 아무도 없다. 이명기: 허공을 밀고 가는 것들, 천년의 시작 2018. ........................... 회복기에 느끼는 아련함 속에서 인간은 누구든 간에 죽음의 흔적을 감지합니다. 그것은 내 몸 속에"먹고 마..

19 한국 문학 2018.04.22

(명시 소개) 최종천의 시 "파업 보름째"

최종천: 파업 보름째 우리 공돌이만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하다 말고 그대로 놓아둔 우리 배속처럼 꼬인 산소 호스와 작업 선들 널브러진 공구들은 우리에게 파업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야 구호를 외치고 하늘을 쳐다본다지만 말도 못하는 저것들은 속이 어떨까? 어둠 속에서 저마다 간절한 눈빛이다. 망치자루를 쥐어본다. 어깨가 뻐근해지면서 콧등이 시큰거린다. 희박해지는 공기와 더러워지는 물은 인간에게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최종천 시집, 고양이의 마술 2011 최종철 시인의 시를 읽으면, 내 자신은 왜 한없이 초라해지고 부끄러워지는 것일까? 최 시인은 오랫동안 노동하면서 시를 써온, 얼핏 보기에는 시인 답지 않은, 그러나 시인 중의 참 시인이다. 그의 글은 어떠한 미사여구도 허용하지 않는 가장 ..

19 한국 문학 2018.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