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凸: 신유물론에 관한 학문적 논의는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 확장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凹: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오늘날 시인과 예술가에게 요청되는 것은 유기물과 무기물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일 것입니다. 어쩌면 애니미즘의 시각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겠지요. 이를테면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그리고 밤하늘을 은은하게 밝히는 달은 더 이상 술 취한 이태백 시인의 이른바 음풍농월의 객체 내지는 미적 대상으로 파악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아름답든 추하든 간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생동하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凸: 오늘날 예술은 주어진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음으로써 사물의 존귀함을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야말로 오늘날 작가와 예술가들이 연속적으로 고수해야 하는 예술적 아비투스라고 여겨집니다.
凹: 네, 그게 바로 애니미즘의 “흙철학”, 바꾸어 표현하면 토본주의의 문학적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凸: 이러한 방향성은 놀랍게도 송용구 시인의 시작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凹: 그렇습니다. 송용구 시인은 오래전부터 생태시를 써왔으며, 서구의 생태시를 연구한 인문학자입니다.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약하여 생태시에 관한 의미 있는 문헌들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그럼에도 송 시인이 지금까지 문학예술뿐 아니라, 학문의 영역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몹시 안타깝습니다. 송 시인은 다른 사람의 시를 많이 소개했으나, 다른 분들은 송 시인의 시작품 속에 도사린 시적 함의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번 주제인 흙의 시학과 토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송용구의 문학을 거론하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凸: 송용구 시인이 처음부터 생태주의에 문학적 방향을 설정한 것은 아니었지요?
凹: 네, 그는 경건한 자세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견지하면서 시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그의 문학은 동독의 시인, 요한네스 보브롭스키Johannes Bobrowski를 연상하게 합니다. 보브롭스키야 말로 생태 의식을 고려할 때 널리 알려진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송 시인 역시 그의 시를 직접 한국 시단에 소개한 바 있지요. 어쨌든 송용구 시인은 2000년 이전에 이미 생태주의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 게 분명합니다.
4.
凸: 이어지는 시편은 송용구의 「물의 마음」이라는 작품입니다.
흐르는 물의 살갗에
머물기보다는
물 속의 물에 들어가
돌이 되어 앉는다
물 속의 물에
불어가는 바람으로
닳아진 귀를 씻고
물 속의 물에
얼비치는 그림자로
주름진 마음을 편다
물 속의 물에 잠들어
오래 감긴
눈을 뜬다
凹: 우리는 송용구 시인의 명시를 세 가지 관점에서 논할 수 있습니다. 1. 존재론적 측면, 2. 천문학적 측면, 3. 윤리학적 측면.
凸: 선생님의 구분이 약간 어색한 것 같지만, 의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측면에서 「물의 마음」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까?
凹: 시인은 물의 개념을 확장하여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을 도출해내도록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용가치로서의 물을 인지합니다. 물이란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서 생명을 보존하는 데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시인은 물의 다른 측면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凸: 다른 측면이라니요?
凹: 시인은 “물 속의 물”을 언급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인식 바깥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사물 내지 객체가 아니라, 사물 속의 거울 내지는 “자연 주체”로서의 물이라고 할까요?
凸: 자연 주체라고 하니, 자연에도 의식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凹: 자연 속에 의식을 지닌 주체가 있다는 주장은 그 자체 완전히 밝혀질 수 없는 가설입니다. 자연 주체에 관한 사고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 1775 - 1854)에 의해서 제기되었습니다. 가령 셸링은 세계의 영혼이 지하 속에서 찬란한 황금빛 나무로 자라난다고 믿었지요.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신의 유고 『자연의 변증법Die Dialektik der Natur』에서 이 점을 암시적으로 언급한 바 있습니다.
凸: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凹: 네, 인간 존재만이 하나의 주체로 세계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자연 속의 사물 역시 세계에 대한 독자적 사고를 개진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문학적 상상으로 추론이 가능한 사항이지요. 그런데 죄르지 루카치는 자연 주체에 관한 논의를 한마디로 “허튼 사고”라고 매도했습니다. 지구가 도대체 어떻게 입을 쩍 벌리면서 무슨 영특한 사상을 뇌까릴 수 있는가? 하는 게 루카치의 지론이었지요.
凸: 그렇다면 루카치는 인간과 사회에 관한 사회경제학적 논의만 중요하게 생각했겠네요.
凹: 그렇습니다. 루카치는 블로흐가 추구한 인간과 사회의 경향성을 높이 평가했지만, 블로흐가 추구한 자연과 지구의 잠재성을 무시하였습니다. 물론 루카치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 앞에서 루카치는 블로흐처럼 아비켄나와 아베로에스 그리고 아비케브론 등과 같은 중세 철학자들에 관해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지요. 조국인 헝가리를 반드시 사회주의 사회로 변모시켜야 한다는 혁명적 초조감이 그로 하여금 자연 주체에 관한 사고를 차단시켰던 것입니다. 자연 주체에 관한 사고는 자연을 인간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물 속의 물”은 사람의 관점에서 고찰한 객체 내지는 사물이 아니라, 그 자체 생명력을 지니는 주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凸: 사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물 속의 물”을 의식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물을 마시고, 물로 빨래하며, 샤워할 뿐이지요. 그렇다면 물의 저편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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