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33

박설호의 시, '곤잘로 라미레스'

곤잘로 라미레스 *박설호 그대가 내게 선물한남미 음악의 카세트에는그대의 희망과 노여움그대의 참을 수 없는고독이 배여 있다 그 음악을 듣고 있으면그대 숨겨 주었다고단도에 찔린 친구피가 배인 볼리비아의진흙이 떠오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커피와 마리화나의 땅허나 그대 아랑곳없이투박한 인디언의미소를 남기곤 했지 곤잘로 언제였던가그대는 뮌헨에서 내게에스파냐 글을 보여주었네시방은 남의 식솔이 된처자의 뒤엉킨 편지를 신(神)과 혁명 그리고사랑 노래한 그대의시(詩)들 하지만 유럽인들횃불에 둘러앉아서노래 부를 줄 모른다 서양의 꽃송이들 다만그대의 남성을 사랑하고순박한 여자바라기그들의 차가운 가슴에불 지필 줄 안다 그대 내게 선물한남미 음악의 카세트에는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칠백 마르크의 생활비망명의 눈물이 담겨 있다 ....

20 나의 시 2025.04.26

박설호의 시,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솟구친 윤슬'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솟구친 윤슬 서해 바다에 흩어진뼈 가루들 아무리 이별이애달프지만 나 또한 한 마리나비 되어 나직이 명멸하는 모습멀거니 목도할 수 있는가 망자들하얀 안개꽃으로 피어 있고순간의 찬란함이 빛으로넘실거리다 떠나네 ...................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서해안에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단원고 학생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듣고 배가 서서히 기우는데도 불구하고, 배 안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ㅠㅠ 결국 이들은 순간의 절망조차 느끼지 못하며 바다 아래에서 수장 (水葬)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재빨리 갑판 위로 올라간 학생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 바로 그 순간 나는 경기도 오산에 있는 늦봄관 강의실에서 프란츠 퓌만Franz Fühm..

20 나의 시 2025.04.17

박설호의 시, '굿바이 칼립소'

굿바이 칼립소박설호  남쪽의 해변에 쓰러진 나에게어슴푸레 접근한 그림자 하나당신은 알려주었지요 사랑은 처음에는새순 키우는 자양이라는 것을 왕궁에서 담은 술 소담한 식사근심을 잊게 하는 단잠당신은 속삭였지요 사랑은 귓속말로간여도 방관도 아니라는 것을 딸기나무 숲 너덜겅에서내 마음 녹이게 하던 당신의 미소무심결에 전했지요 사랑은 시나브로질투를 삭이는 기쁨이라는 것을 은은한 촛불 아래 바라보던알몸으로 잠이 든 당신의 모습새삼 느낄 수 있었지요 사랑은 부끄러운황홀 탐하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차마 고백할 수 없었던수평선 너머 가족의 기다림그래도 깨달았지요 사랑은 치렁치렁자라는 넝쿨 한 줄기라는 것을

20 나의 시 2025.04.12

박설호의 시, ''칼립소에게

칼립소에게 *박설호 당신은 표류하는 나를구조하여 보살펴 주었어요 고마움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모르겠어요 당신 곁에 머무는 게올바른 선택일까요 어찌 곁부축하는 마음헤아리지 못할까요 기억이당신의 크낙한 마음 알지 못하게했을까요 내 눈을 가린 것은귀환의 괴로움인가요 오랜 방랑이 내 가슴을위축시키고 변함없는 고결한 사랑보듬지 못하게 했을까요거친 풍파가 방랑자를이토록 냉혹하게 만들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 어떻게되갚을까요 밤마다 당신의 침실벗어나지 못하는 나는어리석은 바사기 거울 속 그윽한바깥의 세계 잊고 살았지요 드디어 떠나게 되었어요나의 뗏목에 비상식량 걸어주는당신 이별의 손 흔들었지요아 구차한 눈물 보여주기 싫어허둥지둥 노 저었지요 십 년 후 절감하고 있어요우리의 소중했던 일수유내 가슴엔 하늬바람그리움 그리고 사라..

20 나의 시 2025.04.09

박설호의 시, '잠깐 노닥거릴 수 있을까'

잠깐 노닥거릴 수 있을까박설호 썩은 풀에서 생겨난 *암컷 반딧불이가 말한다 모르니까 청춘이라고 아니 꽃봉오리에 옥시토신이 아직 없을 뿐이야 왜 꿈꾸면서 이빨을 갈겠어 그동안 너와 즐겁게 지낸 건 건 사실이야 손잡으면 껴안고 싶고 껴안으면 입 맞추고 싶으며 키스하면 한 몸이 되고 싶었지 하마터면 가슴 부풀어 뻥 터진 뒤에 꺄르륵 자물실 뻔했어 허나 그럴 수는 없지 않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아빠는 내가 흠결 없는 암술이기를 바라고 있어 너도 허청대지 말고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날 찾지 마 안녕 비에 젖어 희미해진 *암컷 반딧불이가 말한다 잘 지냈니 잠시 짬을 내어 나왔어 세월 참 빨리 흐르네 외국으로 떠났다는 소식 들었지 뭐 금의환향한 게 아니라고 어쨌든 직장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난 어영부영 살고 있..

20 나의 시 2025.03.29

박설호 시집, '내 영혼 그대의 몸속으로' 서문

박설호 시집  내 영혼 그대의 몸속으로Meine Seele schleicht in Deinen Koerper hineinMon âme se faufile dans ton corps 서문 오랜 세월 고이 간직한 미발표작 가운데 주로 사랑과 관련되는 시편을 골라 보았다. 내 영혼은 그대의 몸속으로 스며 들어가, 타자의 관점에서 나 그리고 세상을 관망하려고 했다. 그러면 그대는 미소로 화답하고, 어설프게 빙의(憑依)한 나를 멋쩍게 밀쳐내곤 하였다. 이때 감지된 여운은 나를 기쁘게 했고, 위안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다.

20 나의 시 2025.03.26

박설호의 시, '잠자리'

잠자리박설호  이제 눈이 캄캄해지고 힘이 빠지는 걸 느껴요 조만간하늘길이 열리면 훌훌 날아다닐게요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외부의 험난함에 언제나 성을 감추고 살다가 내 어깨는굽고 겹눈 대신 더듬이에 많이 의존했어요 며칠이 지나면 어깨에서 솟아날 날개 그 날개를 펼치면 정말로 나는 저세상의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세상 저편에서 고통과 슬픔 없이 훌훌 날아다니는 꿈이 드디어 실현될까요 내가 잠들면 늙은 가죽부대 빼앗는 대신 내 영혼의 갈망을 관음하고 즐거워하세요 비록 내 몸은 사라지지만 다다 영혼의 후광만은 초짜드막 당신에게 머물게 될 테니까요 내가 떠나기 전에 당신 곁에서 꿀잠 잘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 출전: 박설호 시집, 반도여 안녕 유로파, 울력 2024.

20 나의 시 2025.03.18

박설호의 시, '헤로의 램프'

헤로의 램프박설호  저녁 무렵이면 으레 버릇처럼 내 집처마 위에 램프를 켜두곤 해요그러면 별빛 희미한 어둠 속에서 당신은방향을 잡을 수 있어요 모래 위로걸어 나와 물기를 터는 당신은 이곳의 풀 냄새 그 향기에 취하지요나의 섬에서 함께 사는 꽃과 새들에당신은 뻐꾸기 울음소리에 그만시간관념을 잃지요 아무 것도 아닌 나를그리 애지중지 여기는 당신에게 감사드릴 뿐입니다 당신에게 재화도결혼도 미래도 요구할 수 없지만 그저부담 없이 나를 통해 행복하세요언제라도 찾아오세요 여기에는 이상하게바라보는 자 없거든요 한 시간 혹은 두 밤이라도 개의치 않아요언제나 조언을 구하는군요 난 당신의마음 조각을 이미 알고 있어요당신에게 전할 말은 단 한 가지최상이라고 판단하는 걸 그냥 행하라고 이제 떠날 시간이군요 우리의 만남은이다지..

20 나의 시 2025.03.02

박설호의 시, '모과꽃이 뒤영벌에게 애원하다'

모과꽃이 뒤영벌에게 애원하다 *박설호  불을 끄세요나를 무시해요아무 생각 말아요감촉 느껴요 눈을 감은 채자신도 잊어요겁을 내지 말아요허물 벗어요 날개를 접고이리 다가와요꼭 껴안아 줄게요꿀을 빨아요 손깍지 껴요가만히 몸가락암술과 엉켜 봐요한 몸 되도록 ........................... * 모과꽃의 꽃말은 “유혹”이다.

20 나의 시 2025.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