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15

박설호 시집: '반도여 안녕 유로파' (울력 2024)

(발문) 한반도와 유로파, 이별 그리고 만남 필 거의 반세기 동안 시를 써왔지만, 작품을 거의 발표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에는 수없이 신춘문예에 낙방했고, 나이가 든 다음에는 학문에 몰입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동안 연구 논문이 필자의 든든한 아들이었다면, 시작품은 그야말로 예쁘고 귀한 딸이었다. 체질적으로 근엄한 가부장과는 거리가 먼 에코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지만, 어리석게도 언제나 아들만 세상에 내보내고, 딸을 서랍 속에 가두어 놓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외국어 번역 시집을 해외에서 간행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 역시 부질없는 짓거리라고 판단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나의 딸들은 갑갑한 공간에서 얼마나 자주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을까? 뒤늦게 과년한 딸들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혀서 처음으로 예식장..

20 나의 시 2024.04.23

박설호의 시, '임의 반가사유 2'

임의 반가사유 2 박설호 도근도근 설렘이 가슴 가득 채우면 스님과 사미는 어디론가 출가한다 밤새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 있다 강변에는 소복을 입은 여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다 사미가 머뭇거릴 때 스님은 여인을 업으면서 강을 건넌다 여인이 고맙다고 말할 때 스님은 합장한 다음에 사미와 길을 떠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미가 말한다 여인을 등에 업다니 불경스러운 일이 아닌가요 스님은 대답한다 난 시나브로 잊었는데 너는 아직 마음속에 여인을 품고 있구나 사미가 얼굴을 붉힐 때 스님은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는다 * 일순간 그 열기 게눈 감추듯이 숨는다 ................. * 이 에피소드는 당 헌종 때 단하천연 (丹霞天然, 739 – 824) 선사, 혹은 일본 메이지 시대의 하라탄산 (原坦山..

20 나의 시 2024.04.11

박설호의 시, '뮌헨을 떠나며'

뮌헨을 떠나며 박설호 - “나는 이제 너희를 떠난다./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지냈다.” (Oskar Panizza) * - 잘 있어 뮌헨이여 차갑게 보이는 높새바람 빙하기에도 침식하지 않을 삼각 집 겨울 내내 쌓인 눈이여 안녕 잘 있어 베네딕트 너무나 맑지기 때문에 믿음이 흐릿한 성당 구름에 가려 그림자 잃은 하늘이여 안녕 잘 있어 법(法)이여 죄 저지르면 돈으로 보상하면 그만 지폐 들고 파출소 옆에서 갈긴 소피여 안녕 잘 있어 너무 호듯한 푸른 눈의 노랑머리 여자여 그대는 겉만 눈부실 뿐 안아도 안아도 정(情)을 모르는 서러움이여 안녕 잘 있어 시간이여 언제 떠날 텐가 하고 다그치며 유예된 일 년을 비자 속에 가두어버리던 관청이여 안녕 잘 있어 나의 복마전 내가 설 땅은 어디인가 새내기 배움터 방 구하..

20 나의 시 2024.03.07

박설호의 시 '반도여 안녕 1'

반도여 안녕 1 박설호 비행기 타고 반도 내려다보면 그제야 깨닫게 되리라 소나무 숲과 눈물 가득한 무등산 넓은 강이 보이고 한 많은 철조망이 멀어지는 것을 파농처럼 주먹으로 * 가슴 치며 끌려간 친구 소식에 찢어버린 일기장 이런 어리석은 놈 비행기 뜰 때까지 조심하지 말고 마냥 자학이나 해라 십 년 후에 나는 평화주의자가 되어 귀국 길에 올랐다 지가 묵자(墨子)라도 되나 아쉬운 눈물 몇 방울 맺혀 있는 망명객 슬프지 않는데 비행기에서 강산 내려다보면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소나무 숲과 눈물 말라가는 무등산 넓은 강이 보이고 다시 그 철조망들이 눈에 들어왔다 ** ......................... * 프란츠 파농 (1925 - 1961): 카리브해 출신의 프랑스 심리학자, 철학자. 신식민주의를 ..

20 나의 시 2024.02.21

박설호의 시, '반도여 안녕 4'

반도여 안녕 4 박설호 - 로마의 아우렐리우스는 보헤미아 지방의 마르코를 점령하려 했을 때, 사자를 이용하였다. 힘이 센 마르코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기이한 맹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들 나라는 혼신으로 “로마 산 털 복숭이”들과 피 흘리며 싸우다 몰락하였다. - 천하무적 역도산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니 칼을 들고 덤비는 골목 불량배에게 넓은 배 내밀면서 그는 “어디 마음대로 찔러라.”하고 일갈하였어 칼침에 그가 목숨 잃었다면 그건 오산이야 부상 후 그는 치료받을 수 없었어 단단한 근육 사이로 주사 바늘 꽂히지 않아 쇠 독 번지고 말았지 * “한 나라에 무기가 많이 비축되면 그럴수록 안전하다.”고 믿는 너희 도시인들이여 “충청도 어느 마을에 제주도 모슬포에 핵무기 설치되면 그럴수록 든든하다.”고 믿는 너..

20 나의 시 2024.02.02

박설호의 시, '취리히에서'

취리히에서 박설호 유학이 싫다면서 출국하려는 나를 비웃고 농촌으로 돌아간 형아 우습게도 나는 이곳 알프스의 끝 간 데에 서서 가을장마 물꼬 터줄 당신의 쟁기를 떠올린다 까까머리들 가르치다 손에 묻은 분필가루 또한 막일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다운 이곳 사람들 결코 거꾸로 돌지 않는 롤렉스 시계를 수리하거나 침 발라 돈이나 세며 주말이면 호수 가에서 뱀처럼 마구 허물 벗으며 꼬물꼬물 사타구니를 일광욕시킨다 새 소리에 익숙하여 그들의 귀는 듣지 못한다 타국에서 일어나는 피 맺힌 아우성을 국경 건너온 거액 탓일까 당신은 알고 계시리라 힘 앗긴 나라의 세금 안전한 이곳의 금고 속에서 먼지 묻은 눈물 흘리고 중립적인 이곳 사람들 가난을 쳐다보기 싫어 오래전에는 유대인들을 최근에는 쿠르드족 쫓아내고 보이지 않는 힘 무..

20 나의 시 2024.01.03

박설호의 시, '기젤라 만나다'

기젤라 만나다 박설호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어두움이 섞여 연파랑 눈이 내리는 뮌헨의 사월 어린이 놀이터 기젤라 너는 나에게 말 걸었다 같은 나라네요 저도 그래요 노랗다고 하는 피부 까만 단발머리 가느다란 실눈 위엔 다래끼 하나 소녀답지 않게 너는 애잔히 말했다 세 살 때 왔어요 홀트를 통해서요 너는 모르리라 대구의 어느 여공(女工) 피눈물 흘리며 남의 눈을 피해 핏덩이 버리고 달아나야 했음을 내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요 기젤라 나의 딸 21세기가 되면 비둘기처럼 날아가리 피를 못 속이는 우리의 만남 십분 간 외국에서 ............. 1983년 뮌헨 슈바빙에서 완성한 미발표 작품이다.

20 나의 시 2023.11.15

박설호의 시, '헤로의 램프'

헤로의 램프 박설호 저녁 무렵이면 으레 버릇처럼 내 집 처마 위에 램프를 켜두곤 해요 그러면 별빛 희미한 어둠 속에서 당신은 방향을 잡을 수 있어요 모래 위로 걸어 나와 물기를 터는 당신은 이곳의 풀 냄새 그 향기에 취하지요 나의 섬에서 함께 사는 꽃과 새들에 당신은 뻐꾸기 울음소리에 그만 시간관념을 잃지요 아무 것도 아닌 나를 그리 애지중지 여기는 당신에게 감사드릴 뿐입니다 당신에게 재화도 결혼도 미래도 요구할 수 없지만 그저 부담 없이 나를 통해 행복하세요 언제라도 찾아오세요 여기에는 이상하게 바라보는 자 없거든요 한 시간 혹은 두 밤이라도 개의치 않아요 언제나 조언을 구하는군요 난 당신의 마음 조각을 이미 알고 있어요 당신에게 전할 말은 단 한 가지 최상이라고 판단하는 걸 그냥 행하라고 이제 떠날 ..

20 나의 시 2023.11.05

박설호의 시: 임의 반가사유 1

임의 반가사유 1 박설호 십 년 자고 일어나니 창밖에는 눈포단 소복 걸친 임은 나를 안아줄까 돌아설까 "네 곁에 잠자는데도 이름마저 잊었니?" 반가 사유는 보조의자에 걸터 앉아 무언가 생각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반가 사유는 골똘히 무언가를 떠올리는 혜윰입니다. 이에 비해 반가사유상은 모습입니다. 흔히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보살의 상을 지칭합니다. 사람들은 대자대비( 大慈大悲) 의 마음을 불상에 담아 그것을 표현했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 」 역시 반가사유의 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880년 로댕은 프랑스 국가의 후원으로 단테 알리기리의 『신곡 Divina Commedia 』에 나오는 지옥문을 조각품으로 완성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술..

20 나의 시 2023.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