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122

(명시 소개) 이정주 시집: 홍등

시인은 수십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자신의 기억과 갈망의 편린을 시구 속에 담아 왔습니다. 시인은 어느 상황을 포착하고,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것을 서술합니다. (그러나 행과 행 사이에 숨어 있는 처절한 감정의 여운이 은밀히 드러날 때 나는 놀라운 시적 페이소스에 감복하곤 했습니다.) 상황 속에는 수많은 체험들이 마구 뒤엉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은 현재의 상황일 수도 있고, 과거의 기억의 편린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 홍등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삿짐을 싣고 트럭이 지나간다. 점 보는 집이 지나간다. 얼굴 찢긴 후보들이 지나간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화투를 치는 여자들이 지나간다. 붉은 등 아래 담배를 물고 서 있는 여자도 지나간다. 붉은 등이 그립던 날들과 엥겔스가 옳다고 ..

19 한국 문학 2023.06.06

(명시 소개) (2) 의로운 작가에 대한 기억. 박태일의 시 「두 딸을 앞세우고」

(앞에서 계속됩니다.) 살아 한 번도 집을 지니지 못한 일이 무슨 자랑이라는 눈빛이시지만 일찍부터 너른 마당에 고방에 그대 한 커다란 집이었느니 밀양 사람 다 알지 밀양 땅 좁아 밀양강 줄기는 다시 한 번 용두목에서 꺾였던 것을 밀양강 없이 살아온 그대 밀양이 언제 기억했던가 그래 그대마저 그대를 기억했던가 세월 흘렀다고 시절 흘렀다고 이제는 늙어 희어 고요히 입 다무시나 먼 산 돌길 단풍단풍 구르는 날 두 딸을 앞세우고 찬찬히 찬찬 걷는 그대 뒤 따르면 영남루 대바람 소리 가슴을 찬다. 너: 박태일 시인의 문체에는 조금이라도 가식적인 면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나: 시집 『옥비의 달』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대신에 시적 상상 내지 주제상의 심층성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고 할까요? 시인이 과연 언..

19 한국 문학 2023.05.26

(명시 소개) (1) 의로운 작가에 대한 기억. 박태일의 시 「두 딸을 앞세우고」

너: 시인, 고은의 『만인보 (万人譜)』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 4월 19일이면/ 해마다/ 그들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무덤 저만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무덤 다섯/ 무연고 묘지/ 누구의 자식일지 모를/ 그 혁명의 거리에서/ 쓰러진/ 이름 없는 젊은이의 무덤 다섯// 바로 그 무덤 속의 젊은이를/ 그의 양자로 삼아/ 해마다/ 향과 초/ 떡과 소주를 가지고 와/ 제사지내는 사람이 있다// 표문태 (...)” 나: 네. 고은의 시구를 읽으면, 표문태가 어떠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민주화 운동의 영웅들을 혼자 기리는 분이 바로 작가 표문태 (1914 - 2007)였습니다, 쉰에 가까운 그에게는 20대의 다섯 청년들은 아들과 다름이 없..

19 한국 문학 2023.05.26

(명시 소개) 전홍준의 "좀" - 저항의 시정신

좀 전홍준 수평선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철벅거리며 살아서 어느덧, 불혹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교활한 좀이 되어 세상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살아가는 지금도 어떤 꿈이 있을까 돌아보면 개기름 자르르한 허리와 황금으로 걸신들린 해골박 불어터진 국수가락처럼 질척거리는 인생이 피래미새끼 한 마리 살지못하는 탁한 연못으로 누워있다 남에겐 날을 세우고 내 허물엔 관대하여 동무 하나 없는 적막한 처소에서 석쇠에 나를 굽고 있는가. 凸: 오늘은 전홍준 시인의 "좀"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나는 노새처럼 늙어간다"에 실려 있습니다. 凹: 왜 하필이면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요? 凸: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전홍준의 디스토피아의 역설적 시정신과 관련됩니다. 凹: 어쩌면 작품 "좀"은 시대와 ..

19 한국 문학 2023.04.23

(명시 소개) 서로박: (2) 최영철의 시 "길" (해설)

(앞에서 계속됩니다.) 행여 묵직한 주머니를 넉넉한 여비로 생각지 말게나 그 바람에 바삐 가야 할 길 얼마나 멀고 무거워졌겠는가 凹: 5행과 6행에서 갑자기 시적 화자가 등장합니다. 凸: 네, 시인이 직접 독자에게 무언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실 인간은 모두 태어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객일 수 있어요. 사람들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 내려서 휴식을 취하거나 먹고 마십니다. 우리의 휴식은 어쩌면 고속도로를 지나치다 잠시 들르는 휴게소에서의 시간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凹: 아니면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사이의 대비라고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머니”가 묵직한 사람과 가벼운 사람들은 제각기 씀씀이가 다르니까요. 凸: 좋은 지적이네요.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원하든 원치..

19 한국 문학 2023.04.18

(명시 소개) 서로박: (1) 최영철의 시 "길" (해설)

凹: 오늘은 최근에 간행된 최영철의 시집 『멸종 미안족』(문학연대 2021)을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시작품 가운데 왜 「길」을 선택하셨는지요? 凸: 일순간 어떤 섬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길” 아니면 도(道)를 지적해주는 자극이라고 할까요? 작품은 인간의 삶 그리고 삶의 의미와 방향을 성찰하려는 독자들에게 자극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凹: 그것은 무엇이지요? 凸: 시를 해석하면, 본의 아니게 시구를 해부해야 합니다. 최영철 시인의 작품들은 어떤 성찰과 깨달음을 요청할 뿐, 시 분석을 요구하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행간을 읽고 그 여백을 채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분석을 자제하고, 행간의 여백을 채워나가는 식으로 작품을 읽어야 할..

19 한국 문학 2023.04.18

(명시 소개) 최영철의 두 편의 시

길 최영철 인생이 달디달 때 술맛은 쓰고 인생이 쓰디쓸 때 술맛은 달았네 어느새 사랑에 취한 이에게 모든 길은 파묻혀 보이지 않아도 이윽고 사랑을 놓친 이에게 천지사방 모든 길이 망망대해였네 행여 묵직한 주머니를 넉넉한 여비로 생각지 말게나 그 바람에 바삐 가야 할 길 얼마나 멀고 무거워졌겠는가 먼저 길 떠난 이들이 모른 척 흘리고 간 여비가 차곡차곡 쌓여 저 멀고먼 협곡마다 반짝이고 있으니 나 이제 이 낯선 길 하나도 두렵지 않다네 ..................... 나리꽃 필 때 첫사랑의 정체는 소매치기였어 말 한 마디 없이 나와 너의 순정만 훔쳐 달아났지 나 잠깐 혼절해 있는 사이 그걸 어디 멀리 내다버린 줄 알았는데 이순(耳順) 어느 맑은 날 처음 수줍음 그대로 돌아 왔네 최영철 시집: 멸종 ..

19 한국 문학 2023.04.13

(명시 소개) 문창길의 시: '산족마을 동승 신쀼의식을 보며'

문창길 시인의 명시 "산족마을 동승 신쀼의식을 보며"를 인용합니다. 조만간 해설을 올려놓겠습니다. ............................ 3000미터 고산지대 외딴 산간마을 나의 어린 친구가 속세를 떠나 단기출가를 한다 절 마당에서 동무들과 대나무 공 세팍타크로를 차거나 말고삐를 잡고 풀밭을 찾아다니던 코코 아웅 짧지만 긴 불가의 세계는 높은 산 저 안개밭보다 무궁한 고행을 어린 도반에게 수행케 하리라 뜻도 다 헤아리지 못할 불경을 외우게 하고 붉은 단지를 안고 마을로 내려가 탁발승이 되라 하고 그러다 뜨거운 햇볕 내리쬐면 노승이 주는 샨스타일 얼음과자를 받아 빨면서 맨발의 학승이 되기도 할 것이다 코코 아웅 내일이면 스님으로 불러야 한다 그러다 열흘 후면 다시 속세의 어린 친구로 돌아올 것..

19 한국 문학 2023.03.28

(명시 소개) 전홍준의 시, "금정산"

"난바다를 헤쳐 온 늙은 고래 한 마리 심해에서 건져 올린 지혜를 잘게 부숴 등뼈에다 풀과 나무를 기르고 내 친구 동식이 한숨도 품어주고 막노동 김씨의 술자리에서 말씀으로 훈제한 안주가 되어주기도 하는 언제나 그대가 던져주는 아삭아삭한 꼴 때문에 사하촌의 뭇 생명들 시퍼런 작두날 같은 세상에 베이고도 아직도 미간을 펴고 사는 것이다." (전홍준: 흔적, 전망 2020, 59쪽.) 나: 금정산이 고래로 비유되고 있군요. 그것도 “난바다를 헤쳐 온 늙은 고래”라고 말입니다. 이로써 시인의 섬망 속에는 바다와 땅이 뒤집힌 채 투영되는 것일까요? 너: 산이 고래라면, 인간은 거대한 생명체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작은 난쟁이 릴리푸트와 같을까요? 바다가 늙은 고래에게 험난한 장소였다면, 땅은 우리에게 “시퍼런 작두..

19 한국 문학 2023.03.02

(명시 소개) (3) 사랑과 평화를 위한 진혼곡. 문창길의 시 「지돌이할머니를 추모하며」

(앞에서 계속됩니다.) B: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할 게 있습니다. 일본군인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한 사람도 자신의 과거의 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양심적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본군인 가운데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여성을 능욕한 다음에 살해한 범죄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습니다. 기이하지 않습니까? A: 기이하다기 보다는, 그것은 우리의 소름을 돋게 하는 집단적 망각입니다. 가령 전후 시대의 독일을 생각해 보세요. 유대인들에게 해악을 끼쳤던 독일 사람들은 수치심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과거의 죄는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은 독일인 자신의 감정을 차단하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박설호: 호모 아만스. 치유를 위한 문학 사회심리학, 울력 2017, 116쪽 이..

19 한국 문학 2023.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