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37

블로흐: 트리스탄과 이졸데, 신비로운 결합

누군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위를 오랫동안 응시한다면, 어떨까? 그 부위는 모든 생명체를 황홀하게 만드는 약간 어두침침한 공간을 가리킨다. 이와는 반대로 여자가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남자를 바라본다면, 남자는 어떻게 행동할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인지되는가를 새삼 느끼게 될 것이며, 어떤 놀랍고도 당혹스러운 감정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즉 두 눈길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남자로서 어둠침침한 공간을 아무런 느낌 없이 그냥 벗어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진지한 감정을 품는다고 하더라도, 다만 미소로써 가장 경쾌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남성적 오르가슴을 만끽하지 못하는 경우라든가, 마치 어떤 기이한 상황 속에서 여자 그리고 밀월의 방이 엉뚱하게 교체된 경우를 생..

29 Bloch 번역 2023.03.24

블로흐: 후설의 현상학 비판

수학자들은 미분학을 동원하여 현실의 기본적 요소들을 구성해내려고 시도했다. 이로써 신 자체는 우주의 시작으로부터 도덕적인 종말로, 다시 말해서 요청하는 영역으로 이전되고 말았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명징하게 울려 퍼지고 창세기의 모세의 이야기는 마치 축제처럼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지며, 예언자의 경정에 의해서 대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코엔이 조물주의 존재와 그 기능을 파기한 것은 세계 창시지만 파기한 게 아니라, 수학적 구성 외부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현존하는 존재들을 모조리 파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신칸트학파 사람들은 감각적 물질 그리고 실재하는 개별적 존재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말았는데, 이러한 처사야말로 그들이 카테고리의 논리성을 강조하다가 안타깝게 지불해야 했던 대가였다. 그런데 현상..

29 Bloch 번역 2023.01.26

블로흐: 유산의 세 단계 (6)

지금까지 언급한 바를 요약해보기로 하자. 문화적 유산을 마르크스주의로 수용하는 작업은 엥겔스의 다음과 같은 선구자적인 문장과 결부된다. “만약 인류가 이룩해놓은 모든 풍요로운 문화를 접함으로써 우리의 기억을 풍요롭게 활성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오로지 이 경우에 한해서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 물론 엥겔스는 여기서 독일 고전주의 철학을 인류의 문화적 유산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엥겔스는 문화의 영역에서 오로지 철학만이 유용한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규정하였다. 인류가 남긴 문화적 보물 창고에는 녹슨 물건들 그리고 부패한 나방이 득실거리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들을 일차적으로 제거한 다음에 바로 그 비어 있는 자리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습득한 희망docta spes”을 가..

29 Bloch 번역 2022.09.25

블로흐: 유산의 세 단계 (5)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후기 시민 사회의 유산을 모조리 거부하는 태도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의 예술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에서 시민 사회의 문화를 그런 식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더러 존재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20세기 예술에 대한 슈펭글러의 무조건적인 비난은 결국에 이르면 하나의 불합리한 논증으로 귀결될 뿐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가장 발전된 의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는 시민 문화의 해체 현상 내지는 예술적으로 가능한 다양한 왜곡 현상에 대해 맹목적으로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해체라든가 일그러지거나 꿈틀거리는 왜곡은 저녁 그리고 아침, 다시 말해서 몰락과 개벽 사이에 변증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

29 Bloch 번역 2022.09.25

블로흐: 유산의 세 단계 (4)

언젠가 마르크스는 착취당하는 계급 뿐 아니라, 지배계급 또한 근본적으로 소외 상태에 처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계급이 편안하게 살고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말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문장을 심층적으로 고찰해보면 -낱말의 위트를 사용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중세의 대성당의 면모 속에는 비록 계층 차이의 문제를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지만, 어떤 열광적인 휴식에 관한 놀라운 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사회적으로 소진될 수 없는, 외자존재로서의 인간 소외의 제반 모습들을 예술적으로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세의 건축 장인들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미처 예리하게 간파하지 못한 내용을 마지막까지 추동하여 이를 하나의 결과물 속..

29 Bloch 번역 2022.09.25

블로흐: 유산의 세 단계 (3)

지금까지 우리는 혁명 발발의 유산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문화적 유산의 두 번째 단계는 과연 어디에 위치하는 것일까? 두 번째 단계는 중세 시대에 대성당의 면모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이러한 정점의 단계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첫 번째 원인의 단계와 그렇게 극명하게 구분되고 있을까? 프리지아의 모자는 최소한 원래의 집에서는 붉은 색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디서든 간에 고대 페르시아 왕의 모자를 황금으로 치장한 흰색이라고 받아들었다. 말하자면 프리지아의 모자는 단순히 조화로움을 예견하는 상징물일 뿐 아니라, 지배와 권력을 찬탈하는 객관적 상관물이었던 것이다. 중세의 대성당을 고찰해 보라. 여기에는 비록 모든 권력이 신앙에 빼앗겨 있지만, 우리에게 어떤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조화로움 속에..

29 Bloch 번역 2022.09.22

블로흐: 유산의 세 단계 (2)

혁명의 시대는 이러한 식으로 언제나 이전 시대에 살았던 선구자들을 찬양하였다. 사람들은 이전의 사람들에게서 부분적으로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동질성을 느끼곤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반동적인 시대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가령 기사들이 고립된 성, 왕궁에 머물 때에도 건축가들이 성당을 건축할 때도 나름대로의 이상적인 인물을 떠올리곤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갈구하는 상을 엄청난 범위에서 다르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갈구하는 유산을 반드시 하나로 통일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시민 사회의 출발 당시부터 속출하던 페스트와 같은 질병을 제외한다면, 유산은 어떤 낯선 계급적 내용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몰론 사람들은 이전의 혁명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환호하곤 ..

29 Bloch 번역 2022.09.22

블로흐: 유산의 세 단계 (1)

블로흐는 고대 사회, 봉건 사회 그리고 시민 사회의 문화를 사회주의적으로 수용하는 문제를 숙고했다. 동구의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은 과거의 문화를 통째로 거부하거나, 일부 찬양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블로흐는 인간이 남긴 모든 유산에는 긍정적 부정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지나간 문화적 유산을 새로운 사회에서 바람직하게 수용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오늘날 주어져 있는 모든 문화적 유품의 옥석을 가려내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루카치에 대한 블로흐의 비판이다. 루카치는 후기 시민 사회의 병든 문화를 모조리 거부하고, 고대 그리스의 이상 그리고 독일 고전주의의 자세를 찬양하였다. 이에 비해 블로흐는 개별 문화 그리고 예술 작품들의 호불호를 지적하는 대신에, 그 속에 혼재되어 있는 부정적 ..

29 Bloch 번역 2022.09.22

블로흐: 양자 이론과 원자 모델 (4)

원자의 움직임에 대해 양자 이론을 적용하게 되면, 그때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구체적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원자에 속하는 구성물들이 불연속적으로 밀치는 듯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령 막스 플랑크는 광선 에너지가 마치 양에 따라 시간적으로 어떤 뿐만을 사출된다는 사실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고는 움직이는 행위의 원자론에 관한 단초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드러나는 원자의 작용량인 h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원자 모형의 모든 실험적 수정 사항이 보여준 바 있듯이 생기 없는 자연의 모든 원소의 진행 과정 속에서 함께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물질 그리고 전..

29 Bloch 번역 2022.07.19

블로흐: 유토피아의 의미에 관하여 (5)

(앞에서 계속됩니다.) 가까운 무엇 그리고 멀리 위치한 무엇, 우리는 이 가운데 한 가지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다른 한 가지를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눈앞의 일상적 문제에 골몰하는 나머지 우리가 마음속으로 추구하는 갈망을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희망하는 먼 목표는 너무 멀리 팽개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당면한 문제에 혈안이 되면, 우리는 “갈망이라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사항에 대해 둔감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까이 도사리고 있는 긴급한 문제를 일차적으로 고려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후에 태어날 자손들의 관심사에 부합되는..

29 Bloch 번역 2021.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