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유토피아 73

서로박: (4) 신화와 유토피아, 일치성과 불일치성

(앞에서 계속됩니다.) 16. 신화 수용 역사에 관한 비교 연구: 물론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예외적 사례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화 연구 자체가 아닌, 이후의 시대에 나타난 신화 수용사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예외사항입니다. 우리는 신화 수용의 역사 연구에서 그 수용 시점의 시대정신과 결부된 신화의 수용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통시적으로diachronisch”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시대에 왜 특정한 신화가 유독 활발하게 수용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면, 우리는 신화가 특정한 시대에 끼친 영향 그리고 신화와 주어진 현실 사이의 상호관계를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Jørgensen: 301). 이를테면 왜 유독 괴테의 시대에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활발히 수용되었으며 헤라클레스 ..

26 유토피아 2024.10.09

서로박: (3) 신화와 유토피아, 일치성과 불일치성

(앞에서 이어집니다.) 11. 신화적 역사적 유형의 파멸 이론: 물론 신화 연구가들 가운데에는 과거의 찬란한 삶을 동경하여, 최상의 삶의 조건들을 찾으려는 학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들은 주어진 현실을 하나의 끔찍한 파국으로 설정하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기 위해 역사를 비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의 자세 속에 처음부터 현대의 파멸의 역사를 염두에 둔, 찬란한 과거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 내지는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19세기 중엽에 출현한 마르크스의 진보 이론을 처음부터 부정하고, 시민 사회의 이상을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하려는 과거 지향적 반동주의를 고수하는 자세입니다. 고대 사회가 계층사회 ..

26 유토피아 2024.10.09

서로박: (2) 신화와 유토피아. 일치성과 불일치성

(앞에서 이어집니다.) 6. 축복의 섬에 관한 문헌들: 고대 문학에서는 황금의 시대에 관한 찬란한 상으로서 어떤 축복의 섬이 종종 형상화되었습니다. 호메로스 또한 기이한 섬을 묘사한 바 있는데 요정 키르케가 머무르는 아이올리아 섬과 외눈박이 거인이 사는 섬 그리고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는 연꽃 섬 등이 그의 『오디세이아』에 차례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축복의 섬이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된 것은 기원전 2세기에 활동했던 사모사타 출신의 루키아노스의 『참된 이야기Ἀληθή διηγήματα』를 통해서입니다. (Jens L: 680f.). 루키아노스에 따르면 축복의 섬은 대서양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육체 없는 에테르와 같은 존재들이 살고 있습니다. 수도의 물품들은 온통 금과 은으로 이루..

26 유토피아 2024.10.05

서로박: (1) 신화와 유토피아, 일치성과 불일치성

이 글은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울력 2019) 제 1권에 실려 있습니다. 많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 1. 고대 유토피아의 두 가지 방향 (1): 신화와 유토피아 사이의 관련성은 아직도 학문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입니다. 서양의 신화가 과연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유토피아와 상관관계를 지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고대의 유토피아를 구명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방향이 채택되었습니다. 첫째로 유토피아의 모범으로 인정받고 있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많은 부분에 있어 플라톤의 『국가』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고대의 많은 범례에서 “국가주의의 유토피아archistische Utopie”의 틀을 도출..

26 유토피아 2024.10.05

서로박: 알프레트 도렌의 유토피아론

알프레트 도렌은 1927년에 「갈망의 장소 그리고 갈망의 시간 Wunschträume und Wunschzeiten」이라는 논문을 집필하였다. 원래 그는 1920년대에 출현한 한스 기어스베르거 Hans Girsberger 그리고 헤르만 온켄 Hermann Oncken의 저작물을 접하고 유토피아의 지형도를 분명하게 설정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도렌은 유토피아 그리고 천년왕국설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시켜서 독립적으로 해명하는 처사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토피아와 천년왕국설은 그 자체 갈망의 장소 내지 갈망의 시간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렌은 유토피아의 문헌으로서 모어의 『유토피아』를 거론하지만, 천년왕국설의 문헌으로서 『오버라인 지역의 혁명가 Der oberrheinisc..

26 유토피아 2024.04.19

서로박: 미하엘 빈터의 유토피아

미하엘 빈터는 1978년 『유토피아 개관 Compendium Utopiarum』의 발표했는데,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즉 서구 산업 국가가 유토피아로부터 등을 돌린 것은 유토피아의 사고가 대폭 실현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토피아의 땅은 오늘날 스위스로부터 하와이를 거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어진다고 한다. 현대 사회는 의학을 발달로 인간의 수명을 늘려놓았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이 추구하던 식량 공급의 이상을 실현하였다고 한다. 신용카드는 영원한 풍요로움을 보장해주고, 여행 산업은 지속적으로 붐을 맞이하고 있다. 맹수는 지구상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인간은 법령에 의해서 어느 정도 제한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연의 위험은 현대의 간접 자본의 시설로 인해서 사전에 차단되고, 국지전을 제외하면 거..

26 유토피아 2023.10.31

서로박: 홀란트-쿤츠의 페미니즘 유토피아

요아힘 페스트는 1991년에 『유토피아의 종말』을 발표하여, 현대에는 더 이상 유토피아가 필요하지 않다고 피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여성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바르바라 홀란트-쿤츠는 「다른 주체의 유토피아」그리고 『새로운 여성 운동의 유토피아』에서 페스트의 주장을 한 마디로 일축하였다. 왜냐하면 60년대 이후로 수많은 여성 작가들이 21세기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서의 여성주의 유토피아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유토피아의 설계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여성에 대한 성 정치적 편견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실러가 자신의 시에서 묘사한 바 있듯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여성에게서 고뿔이 풀리면, 가장 끔찍한 광기가 날뛰게 ..

26 유토피아 2023.09.11

서로박: 빌케의 아토피아 사회

헬무트 빌케 (1945 - )는 니클라스 루만의 시스템 이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아토피아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에 이르러 현대 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변화되고 있다. 가령 국가의 영토 구분은 오늘날 급진적으로 해체되어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 제한이 없으며, 사회의 변형이라든가 이행의 과정은 디지털화 되어가고 있다. 고전적 유토피아의 전통은 거의 파괴되고, 그 대신에 디지털 사회 구조가 정착되었다. 이로써 출현하는 것은 아토피아라고 한다. “아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뜻과는 달리 정치적 영역으로서의 장소의 중요성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아토피아는 정치와 복지 국가에 대한 믿음에 대항하는 사고로 출현한 셈이다. 변화된 사회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

26 유토피아 2023.04.08

서로박: (5)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설

(앞에서 계속됩니다.) 25. 재세례파와 토마스 뮌처의 농민 혁명에 대한 평가: 15세기 말부터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국가의 폭력 그리고 이에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교회 체제에 굴복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들은 뮌처를 중심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으로서의 상호부조의 사회를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계획은 종교 혁명의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결국은 재세례파와 뮌처의 농민 운동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고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는 종교 개혁 및 사회 개혁의 움직임으로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더 나은 삶을 구현하여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지상의 천국을 구현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나중에 카를 카우츠키는 자신의 책에서 농민 혁명을..

26 유토피아 2023.04.02

서로박: (4) 토마스 뮌처의 천년왕국설

(앞에서 계속됩니다.) 17. 루터의 변절과 그의 언어적 폭력: 루터는 고위층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1521년 보름스 성당에서 고초를 겪은 뒤에, 성서 번역에 몰두하고, 세상사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루터가 보름스 성당에서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고, 권력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체득한 죽음에 대한 위기의식은 이후 그의 정치적 행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후에 보여준 루터의 정치적 입장은 수구반동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가령 루터가 독일 농민 혁명 당시에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농부들의 폭동을 천민들과 강도떼의 폭력적인 난동이라고 규정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루터는 기득권 세력에 빌붙어서 체제 옹호적으로 처신한 셈입니다. 그의 짤막한..

26 유토피아 2023.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