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일시 62

서로박: 야콥 반 호디스의 시

유대인 시인 야콥 반 호디스 (Jakob van Hoddis, 1887 - 1942)는 독문학사에서 [당대의 시인이었던 슈테판 게오르게, 게호르크 하임, 게오르크 트라클 등에 가려]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다. 그의 시적 특징은 초기 표현주의에 입각한 격정, 절망과 좌절 그리고 극심한 우울 속에 담긴 자아 상실 의식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항은 유태 여류 시인인 엘제 라스커-쉴러를 몹시 닮은 것 같다. 시 “세계의 종말”은 야콥 반 호디스의 대표작이며, 나아가 초기 표현주의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시민의 뾰족한 머리에서 모자가 날아가고, 공중에서는 온통 마치 외침 같은 게 울려퍼진다, 기와들이 무너져 내려, 두개로 쪼개지고, 해안에는 -우리는 읽는다- 밀물이 솟구친다. 폭풍..

21 독일시 2024.04.20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시, '죽음', '사랑'

죽음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 아, 죽음의 방은 너무나 어두컴컴하네 그가 움직이면 슬픈 소리가 나. 이제 그 시간이 다가오면 그는 무거운 망치를 들어올리네 Der Tod Ach, es ist so dunkel in des Todes Kammer, Tönt so traurig, wenn er sich bewegt Und nun aufhebt seinen schweren Hammer Und die Stunde schlägt. 사랑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 사랑은 아무것도 개의치 않아 문도, 빗장도 몰라 모든 것을 뚫고 들어오지. 사랑은 시작 모르게 오랫동안 날개를 펄럭였어 영원히 날개를 퍽럭이지 Die Liebe Die Liebe hemmet nichts; sie kennt nicht Tür noch Riegel,..

21 독일시 2023.12.18

로만 리터의 시 "우체국에서 낯선 사람 끌어안기"

우리는 차타고 돌아간다, 한 두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휴게소에서 커피 마시고 테이블 가장자리의 맥주 깔개를 높이 던졌다가 공중에서 붙잡았다. 나중에 운전은 교대될 것이다. 밤이다, 약간 비가 내리나, 자동차 안은 따뜻하다. 운행 중에 들리는 바람의 파열음, 계속 둔탁하게 들리는 바퀴소리 완충기 장치의 무게는 피곤하게 만드나, 잠이 오지는 않는다. 나는 자신의 가죽 속의 짐승처럼 느낀다. 어떤 동굴, 어떠한 물기도 스며들지 않는 가죽 속의 어느 동물, 두렵지 않다. 내 어깨에 기대고 있는 어느 여자 꼼짝하지 않고, 커브를 돌 때 그녀는 무겁기도 가볍기도 하다. 이러한 애무를 위해서 손을 건드릴 필요도 없다. 신속하게 지나가는 불빛 서서히 스쳐가는 붉은 빛들, 그건 다른 차들이다. 통상적인 위험에 해당한다..

21 독일시 2023.11.04

마르가레테 슈테핀의 시 '내 어렸을 때 당연히 인형과'

내가 소녀였을 때 당연히 인형과 노는 것을 가장 즐겼어요. 열일곱 나이였을 때 나는 물론 첫 번째 사랑을 느꼈어요. 처음엔 엄마가, 다음엔 애인이 이렇게 말했지요, 그래, 아이야, 너는 아마 쌍둥이를 낳게 될 거야 (아시겠지요, 사랑이 눈멀게 한다는 걸) 먼 훗날 서로 만나 사랑했다면, 아주 멋지게 출산했을 테지요. 허나 그분이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즉시 곤궁함에 시달렸지요. 아무리 거대한 사랑이라도 우리의 생활비 걱정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어요. 직장 없는 자는, 자식이 생기지 않도록 항상 신경 써야 하니까요. 실제로 근심으로 가득한 수많은 아이들을 바라보았어요. 나는 내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요. 도움을 얻으려고 발버둥 쳤으니까. 그래도 13주 동안 아기를 품었지요, 이후에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어요..

21 독일시 2023.10.30

한스 페터 크라우스의 시

한스 페터 크라우스 (1965 - ) 물음표와 함께 하는 짝짓기 목록 즐겨 먹기 살아가기 사랑하기 칭송하기 살아가기 칭송하기 즐겨 먹기 사랑하기 사랑하기 살아가기 칭송하기 즐겨 먹기 살아가기 즐겨 먹기 칭송하기 사랑하기 칭송하기 살아가기 사랑하기 즐겨 먹기 살아가기 사랑하기 즐겨 먹기 칭송하기 그럼 “루벤”은? Paarungstabelle mit Fragezeichen laben leben lieben loben leben loben laben lieben lieben leben loben laben leben laben loben lieben loben leben lieben laben leben lieben laben loben luben? 통일 어떤 씨앗 낟알 어떤 씨앗 무엇 같은 고독한 Verei..

21 독일시 2023.10.16

서로박: 뫼리케의 '오르플리트 나의 땅'

에두아르트 뫼리케 (1804 - 1875)의 초상화 친애하는 J,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고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인에게 고향은 시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고향은 유년의 시기에 보냈던 정겨운 공간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고향은 대체로 시인이 고유하게 체험했던 과거의 공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목사, 시인으로 살았던 에두아르트 뫼리케 Eduart Mörike (1804 - 1875)에게 고향은 자신이 실제로 살았던 유년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고향은 지상에서 발견될 수 없는 곳이었으며, 그의 젊은 친구들 (루드비히 바우어, 빌헬름 바이블링거)과 함께 가상적으로 상상해낸 이상의 장소였습니다. 뫼리케는 그 장소를 “오르플리트 Orpl..

21 독일시 2023.09.24

리하르트 피츠라스의 '아버지에게'

아버지, 당신의 커다란 두 손 무엇을 위해 아껴 두셨나요? 그걸로 여러 자루를 짊어지고 방앗간으로 수레 끌곤 했지요. 오한을 느끼며 전선으로 달려도 총알 하나 잃은 적이 없어요. 아, 당신은 어떻게 돌아왔나요? 눈멀고 머리카락 박박 깎인 채. 당신의 두 손을 기억했나요? 두 손이 멀쩡해 있었다는 걸. 아침에 탄광으로 차타고 가서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왔어요. 아침에 당신은 당을 찾았지만, 저녁에는 탈당하려고 했지요. 당신은 항상 뼈 빠지게 일했고, 허름한 뒷집에서 거주했어요. 우라늄과 다듬은 목재를 끌고, 상자, 끈 묶은 다발을 날랐지요. 어느새 두 다리가 노화되어, 어느 순간 당신은 쓰러져야 했어요. 이제 병원 문 앞에서 깨어나, 천국의 교통정리 애쓰는군요. 당신 소원은 훨훨 날아보는 것, 당신의 두 ..

21 독일시 2023.09.18

한스 울리히 트라이헬의 '자화상, 수정된'

자화상, 수정된 한스 울리히 트라이헬 마지막 남은 머리카락 없어지렴. 인간은 해골과 뇌라고 하니까. 진단: 세월과 함께 수축된다. 하늘 속에는 달, 나의 천체. 전망은 항상 동일한 것이다. 풍경: 아마도 나무들이 있으리라. 인간: 처음엔 젖먹이, 다음엔 시체. 별들은 영원하다. 그걸로 충분하리라. 창백한 피부색으로 구성된 어느 허상. 이전에 아주 미끄럽게 수행되었다. 어느 분화구, 균열, 어느 흉터: 그것은 자화상이야, 수정된. (Selbstporträt, korrigiert von Hans-Ulrich Treichel: Weg mit den letzten paar Haaren./ Der Mensch sei Schädel und Hirn./ Diagnose: geschrumpft mit den Jahre..

21 독일시 2023.08.20

서로박: 넬리 작스의 시

1. 넬리 작스의 초기 시 독일계이자 유대계 여류 시인 넬리 작스 (1891 - 1970)는 1947년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자신의 작품은 “어떤 말할 수 없는 것을 불충분한 언어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아우슈비츠의 체험을 지칭하는데, 작스가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추적한 모티브였다. 넬리 작스는 시 외에도 산문과 드라마를 집필했다. 이것들은 인간적 고뇌의 술회로서, 그칠 줄 모르는 외침으로서, 죽음 앞의 기도, 회고록 그리고 탄핵의 글로서 이해된다. 그미의 창작 행위는 처형당한 자, 이름 모르는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자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논리적 언어 내지 전통적 미학은 아우슈비츠를 묘사하기에는 전혀 쓸모없다. 그렇기에..

21 독일시 2023.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