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김명기의 시, "청량리". 고통이 안쓰럽다 못해 신비하게 느껴질 뿐이다.

필자 (匹子) 2023. 1. 25. 11:28

김명기 시인의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을 구해서 완독하였다. 김명기 시인이 어떤 분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나는 모른다. 알지도 모르면서, 오로지 시편에 의존하여 시인의 시 세계를 탐색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 처사인가. 빙산 일각으로서의 시편들 – 나열된 언어의 배후에는 얼마나 육중하고 무거운 서러움이 숨어 있을까. 시인은 중장비 기사직을 그만두고 유기견 구조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버려진 개들이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 그의 시각은 낯선 장소로 향하고 있다. 김 시인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물들을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투시한다. 그곳은 주로 시골의 「아랫집」이고, “강변”이며,「황지」이고,「유기 동물 보호소」 아니면, 「폐사지」이다.

 

그 밖에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낮은 시각 외에도 시인의 톤이 너무나 나직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베이스의 낮은 음성으로 독자에게 사멸하는 생명체, 질병 그리고 죽음에 관한 말씀 조용히 들려준다. 시골은 버림받은 세상처럼 소리 없이 내팽개쳐져 있다. 이곳에는 세상의 모든 아픔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 시인은 어쩌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처절한 사물의 아픔을 슬픔의 체로 여과하여 표현하려는지 모른다. 이 가운데 시 한 편이 필자의 눈에 띄었다.

 

자작나무 그늘아래

사내 몇이 잠을 청한다

덜 취한 몇은 남은 술병을 기울이고

아이들은 작은 돌을 던지며 비둘기를 쫓는다

익명의 절망이 모여 이런 평온한 풍경이 되다니

 

인도에선 부랑아도 신비롭다던 말을

면전에서 비웃은 적이 있다

그렇게 부러우면 신비롭게 살든가

 

그땐 알지 못했다

혀끝에 담지 않고 뱉어낸 말에서

모든 비하가 기어 나온다는 것을

부랑아와 당신 그리고

먼 나라의 알 수 없는 신비까지 참 무참했겠다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청하는 사내들과

무심히 술병을 기울이는 그들과

비둘기를 향해 날아가는 작은 돌까지

신비로운 부랑의 곁에서 당신도

누군가를 비하했던 순간을 생각했을지 모르는데

 

오래 입은 속옷처럼

자취라는 말을 버릴 수 없어

몸이 기억하는 시간 속으로

쓰러지지 않으려 휘청거리며 견디는 생들이

안쓰럽다 못해 신비하다

그날 당신이 성내지 않던 이유를 비로소 알겠다

 

더는 멀리 갈 수도 없는

이승의 한 귀퉁이를 껴안은 채

간신히 늙어가는 사내가

받던 술잔을 떨어뜨리며 제 그림자 위로 포개진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 사람 시인선 56) 32 – 33쪽

 

 

때는 여름날 어느 오후이며, 장소는 자작나무가 있는 청량리의 공원임에 분명하다. 몇몇은 술 마시다가 쓰러져 잠을 자고 몇몇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아이들은 돌멩이로 비둘기를 쫓으며 분풀이를 하고 있다. 시인은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에서 “익명의 절망”을 감지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공원의 한 장면은 일견 평온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방인의 눈에는 낯설다 못해 무척 신비롭게 비칠 정도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생은 그렇게 안온하지도 않고 신비롭지도 않다. 여행객에게는 인도의 "부랑아"도 신비롭게 보인다. 그 이유는 여행객이 인도인의 삶, 삶에서의 괴로운 처지 그리고 해원 등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디 여행객만 그러하랴. 남들은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차제에 어떠한 절망이 다가올지 전혀 알지 못한다. 도대체 가슴속의 어떤 내밀한 상처가 우리를 술 마시게 하고 잠시라도 자신을 망각하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함부로 타자의 속내를 관망, 아니 관음하고 싶어 한다. 인도에는 부랑아도 신비롭다는 말을 듣고 시인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떠올린다. “그렇게 부러우면 신비롭게 살든가” 낯선 이방인, 혹은 여행객은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경박하게 판단한다. 이 말 속에는 어떤 기이한 삶이 나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소시민의 냉담함이 묘하게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혀끝에 담지 않고 뱉어낸 말에서 모든 비하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을 느낀다.

 

작품은 두 가지 사항을 독자에게 전한다. 첫째로 시인은 청량리의 자작나무가 자라는 어느 공원에서 “휘청거리는 생”을 목격한다. 생은 우리가 벗어던지지 못한 "속옷”처럼 거추장스럽다. 뒤섞인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들 마음을 마구 짓눌러 술 마시고 쓰러지게 하는데, 세상은 어찌하여 이렇게 평온하게 보이는 것일까? 멀리서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평온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예의 주시하면, 개개인의 마음을 내리누르는 고통이 “안쓰럽다 못해 신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래, 여행객이 바라보는 하늘과 바다는 정겹고 아름답다. 그러나 거기에는 작은 생명체들이 더 큰 폭력에 의해 잡아 먹히고, 물고기가 상어에게 공격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행객, 혹은 이방인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청량리」의 두 번째 시적 주제를 가리킨다. 자고로 인간은 자신의 처지와 관심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고찰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고, 듣고 싶은 것만 청취하려고 할 뿐이다. 바꾸어 말해서 스스로 겪어보아야만 우리는 타자의 (삶의) 고통, 이로 인한 심리적 아픔을 비로소 속속들이 감지할 수 있다. 우리에게 돈이 없으면, 삼시세끼 해결하는 것도 녹록치 않다.  “간신히” 늙어가면서 “몸이 기억하는 시간” 속에 머물면서 자취 (自炊)하는 사람들 – 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분들은 주위에 그렇게 많지가 않다.

 

시 읽기는 자신의 관심 속에 도사린, 어떤 상투적 편협성을 떨치게 하는 과정이며, 폐쇄적 자아에게 하나의 심리적 (예술적?) 탈출구를 마련해주는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