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136

(명시 소개) 정은정의 시,「동백꽃」

나: 동백꽃은 누군가를 혼자 사랑하는 영혼을 떠올리게 합니다. 12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는 어느 저녁 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따뜻한 집에 머뭅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이 있습니다. 너: 대부분 사람들은 누군가 기혼남, 혹은 기혼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연정을 순식간에 저버립니다. 그런데 드물게 이를 개의치 않게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의 인간됨됨이에 반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면 너무나 강렬한 사랑에 대한 반작용 때문일까요? 동백꽃은 찢겨지는 가슴을 끌어안으면서 몰래 임의 집 가까이 머뭅니다. 그렇지만 동구 밖 먼 곳, 임의 집 바깥에 서성거리면서 눈물만 흘리지요. 바로 이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꽃이 동백꽃입니다. 너: 그..

19 한국 문학 2021.05.09

(명시 소개) 정은정의 '내 친구 숙이'

백목련같이 화사한 시절 숙이를 만났다. 그녀는 일상에서 하냥 스치는 바람에 불과할 뿐 그 무엇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그녀를 만나게 된 날은 세상 소낙비에 맞아 온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되었던 날이었다. 처참한 물골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멈칫거리고 있을 때 먼저 환하게 맞아주며 젖은 옷을 닦아주던 숙이! 벼랑에 서 있을 때 그녀는 내게로 들어왔다 하루하루가 꽃샘추위였던 날들 그녀는 봄꽃이었다. 가슴에 용광로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녀에게서 뜨거워지는 법을 배웠고 뜨거움을 나누는 법도 배웠다 사랑의 반열 맨 앞에 숙이를 세운다. 정은정의 「내 친구 숙이」, 정은정: 내 몸엔 바다가 산다, 전망 2014, 58 - 59쪽. 나: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은정 시인의 작품 한 편을 ..

19 한국 문학 2021.05.01

(명시 소개) 이동순의 시,「눈물의 세월」 (2)

(앞의 내용을 계속 이어갑니다.) 나: 그래서 그들은 한인들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경계했군요. 너: 1930년대 후반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극동지역에서는 1936년부터 일본 관동군과 소련군 사이에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서 군사 충돌이 빈번했습니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일본과 소련 간에 전면전으로 비화될 수도 있었습니다. 내전을 겪은 뒤에 기사회생한 스탈린 입장에서 극동 지역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했지요.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전개되는 한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이 일제를 자극,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몹시 우려했습니다. 나: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에 발발하자 소련 인민위원회와 볼세비키 중앙위원회는 「극동지역 국경부근에..

19 한국 문학 2021.04.23

(명시 소개) 이동순의 시,「눈물의 세월」(1)

「눈물의 세월」 이동순 그해 동짓달 텃밭의 무 배추 막 수확 앞두고 있었는데 벼락 같이 이주 명령 떨어졌네 이틀 안에 이삿짐 싸서 우라지오 역으로 집결하라고 하네 사나흘분 음식 집집마다 준비하라고 하네 아직 농작물 거두기도 전인데 달리 먹을 게 어디 있나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저 만만한 닭 돼지 모조리 잡아 굵은 소금 뿌려 고기 장만하고 감자 옥수수 밀가루 자루에 담아서 꽁꽁 묶고 덮던 누더기 이불 몇 채 둘둘 말아 역으로 가는데 어찌 그리도 눈물이 흐르던지 가다가 돌아보고 또 가다가 돌아보고 앞마당 삽사리는 수상한 눈치 채었는지 마냥 짖으며 뒤따라오는데 주인 잃은 다른 집 개들도 허둥지둥 역 구내 인파 사이로 두리번거리며 헤매는데 무정한 이주열차는 검은 연기 뿜으며 기적 울리는구나 흰둥아 나 지금 떠나지..

19 한국 문학 2021.04.23

(명시 소개) 박현수의 시, 「‘응’이란 말」(2)

박현수: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울력, 2015, 71쪽 이하.) 나: 앞에서 우리는 박현수의 시작품을 미시적으로 고찰해 보았습니다. 시 「‘응’이란 말」은 사랑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구명하면 어떨까요? 여기서 우리는 시적 주제와 관련되는 거시적인 제반 문제점을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령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사랑을 차단시키는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을 강제적 성윤리로 설명하면서, 여기서 파생되는 사회 심리적 하자를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너: 아, 네. 오늘날에 이르러 강제적 성윤리는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동성애에 관한 논의에서도 많은 편견이 사라졌으니까요. 그런데 개인 내지 가족 구성원을 고려할 때 강제적 ..

19 한국 문학 2021.01.17

(명시 소개) 박현수의 시, "'응'이란 말" (1)

나: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너: “응”. 나: “응”이라는 대답 속에는 동의가 숨어 있군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에는 주종 관계가 자리하는 반면에 “응”이라는 대답은 이와는 다른 것 같아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 그리고 동등한 관계를 연상시키니까요. 너: 요즈음 젊은이들은 카톡을 주고받을 때 응이라는 단어 대신에 그냥 동그라미 이응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응이라는 단어 속에는 수긍하고 동의한다는 의미가 은밀하게 내재해 있군요 나: 문정희 시인의 시 「응」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햇빛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

19 한국 문학 2021.01.15

잔인한 낙향

정약용의 제보은산방을 읽었습니다. 나 서로박은 짤막한 장편소설로 시인 정약용의 심경과 처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 세상에 이 정도로 잔인한 낙향은 아마 없을 것이다. J의 낙향이 그러했다. 기독교가 나라를 말아먹는 신앙으로 낙인 찍힐 무렵 셋째 형, 약종은 다만 우연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박애의 늪에 빠져들면서 종교적 희열에 서서히 감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유입된 기독교 신앙은 19세기 한반도에서 혹세무민하는 이단 종교로 박해 당하기 시작했다. 정씨 가족은 이름 있는 가문으로서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집안이었는데, 서양의 신비로운 신앙을 접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가문은 삼족이 멸하는 고초를 감수해야 했다. 천신..

19 한국 문학 2020.12.16

(명시 소개) 정끝별: 유리병 속에 시를 담는 마음으로

정끝별: 유리병 속에 시를 담는 마음으로 "그래 그때쯤이면 시집은 한 '십여년만'에 내면 좋을 것도 같아...... '여전히'라는 부사를 쓸 수 있었으면 해...... 그래 내가 아꼈던 '섬세'라든가 '통찰'이라든가 '정갈'이라는 말이 정말 제값을 했으면 해...... '조용한 사랑'을 돌아보자는 것도 좋군...... 조금은 식상하기는 하지만 표현 그대로의 '삶의 장면들'과 '사물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돼...... '깊고 따뜻한 성찰'이라는 말이나 '제 아름다움'이라는 말도 낡았지만 얼마나 소중한 말이란 말인가......" (강은교 외: 유쾌한 시학강의 아인북스 2013, 289쪽에서 인용) 선생님, 잘 아시겠지요? 상처입은 느낌은 즐비하지만, 시구들은 정작 출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시구의 어설픈..

19 한국 문학 2020.12.16

(명시 소개) 신철규의 시 "상처"

나의 상처라고 무조건 타인에게 상처줄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가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상처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상처 받은 사람도, 상처 받지 않은 사람도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타인을 끝까지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들이다. 타인은 언제나 나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나를 타인의 자리에 놓지 않을 때, 타인의 눈빛과 목소리에 집중하지 않을 때, "소통"은 어차피 거짓과 위선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조금씩 버리는 게 용기라고 생각한다. 나의 구원만큼 타인의 구원도 중요하다고 깨닫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19 한국 문학 2020.11.30

(명시 소개) 차주일의 시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 사랑"

자신을 먹이로 쫓던 새를 찾아가 그 새의 눈물을 빨아먹어야만 살아남는 나방이 있다. 천적의 맥박 소리에 맞춘 날갯짓으로 잠든 눈까풀을 젖히는 정지된 속도로 천적의 눈물샘에 긴 주둥이 밀어 넣을 수 있었던 진화는 천적의 눈 깜박이는 찰나에 있다. 천적의 눈물에 침전된 염기를 걸러 제 정낭을 채운다는 미기록종 나방이여 상사 빛 날개를 삼켜 다시 염낭을 채워야 하는 새여 날개로 비행 궤적을 지우는 고요의 동족이여 제 감정에 마음 찔려본 자만 볼 수 있는 궤적은 내가 가위눌린 몸짓으로 썼던 미기록종의 자음들 나여, 불면이 네 눈으로 날아와 살아남으려 함은 이미 제 영혼인 울음을 간수할 유일책이기 때문 나여, 새의 부리를 조용히 열고 울음통 속으로 들어가 보아라. 차마 소리로 뱉지 못할 자음이 있어 모음만으로 울..

19 한국 문학 2020.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