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동백꽃은 누군가를 혼자 사랑하는 영혼을 떠올리게 합니다. 12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는 어느 저녁 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따뜻한 집에 머뭅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이 있습니다.
너: 대부분 사람들은 누군가 기혼남, 혹은 기혼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연정을 순식간에 저버립니다. 그런데 드물게 이를 개의치 않게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의 인간됨됨이에 반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면 너무나 강렬한 사랑에 대한 반작용 때문일까요? 동백꽃은 찢겨지는 가슴을 끌어안으면서 몰래 임의 집 가까이 머뭅니다. 그렇지만 동구 밖 먼 곳, 임의 집 바깥에 서성거리면서 눈물만 흘리지요. 바로 이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꽃이 동백꽃입니다.
너: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는 동백이 피지 않습니다.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일부다처제를 준수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인한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에 애틋한 사랑의 열정 또한 자리하지 않지요. 세 명의 여성을 거느리는 남자는 의무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을 방문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합니다. 남한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지요.
나: 그렇지만 많은 게 허용되는 인도네시아에서 사랑은 그 자체 지루함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너: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느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애틋함은 저곳에서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지루함과 권태를 상쇄해주는가 봅니다. 혹자는 유부남 (혹은 유부녀)와의 사랑이야 말로 두 배로 강렬하고, 동성애의 사랑이 가장 강렬한 열정이라고 말하더군요.
나: 헉, 이상하게 들리는군요. 하기야 누가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겠어요? 한 가지 분명한 게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가? 하는 물음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로 나누어집니다.
너: 동의합니다.
나. 비근한 예를 들어볼게요. 나의 이모부는 은행장이었습니다. 생전에 그는 많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였습니다. 이모부는 차씨 3대 종손이었습니다. 슬하에 딸 다섯을 거느렸는데, 이모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해 오랫동안 슬픈 나날을 보냈습니다.
너: 70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요?
나. 네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장례식장을 가득 채운 문상객들 가운데는 이모부를 꼭 빼어 닮은, 수려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이모부의 혼외 자식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나의 이모는 이 사실을 접하게 되자, 이별의 아픔은 배신감으로 돌변했습니다. 몰래 다른 여인과 딴 살림을 차리고 아들까지 않은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던 것입니다.
너: 궁금한 것은 이모부의 내연녀의 삶입니다. 어떻게 수십 년 세월 동안 이모부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와 은밀하게 조우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해서는 안 되는데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나: 잘 모르겠어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 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내연녀는 항상 이모부 근처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아들과 살면서, 이모부를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자고로 인간이라면 누구든 간에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진 갈등과 아픈 상처를 참고 견뎌내었을까요? 그것도 철저히 비밀스럽게 처신하면서 말입니다.
너: 동백꽃이 누군가를 혼자 사랑하는 영혼이라는 당신의 주장은 그럴듯하네요. 정은정 시인의 시조를 골라보았습니다.
걸음마다 낭자한 선혈
처절한 종말이여
차마 울음 접고
타는 몸 추스립니다
도무지
지우지 못할
사랑 하나 있나 봐요
정은정의 「동백꽃」
너: 시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핵심을 찌르는 간명함을 느끼게 합니다.
나: 추운 날 동백은 붉은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동백꽃은 겨울마다 피는데, 마치 “선혈”을 흘리며 살아가는 여인처럼 보입니다. 시인의 눈에는 꽃이 쓰라린 영혼의 상처이며, 피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동백꽃은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주위 여건은 이를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 원래 동백꽃은 집의 안채에서 피지 않고, 언제나 바깥에서, 길가에서 꽃을 피우지요?
나: 그렇습니다. 동백꽃은 혼인의 연을 맺을 수 없는 꽃, 즉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꽃이지요. 그러다 3월이 되지 전에 “낭자한 선혈”을 감추지 않은 채 지고 맙니다. 미련 없이 스러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처절한 종말”이지요.
너: 특이한 것은 동백꽃의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지 않고, 동백꽃 전체가 꽃자루에서 떨어져 나와서, 마치 처마의 고드름처럼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울음 접고, 타는 몸”을 절벽 아래로 던지는 여인처럼 말입니다.
나: 재미있는 비유로군요.
너: 사랑하는 임으로부터 버림받은, 외면당하는 영혼이 동백의 숙명일까요?
나: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동백의 낙화는 참으로 애틋하게 느껴지지만, 너무 아름답습니다. 동백의 사랑의 흔적은 시간이 흘러도 “지우지 못할 사랑”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너: 사랑이 지워지지 않는 까닭은 불가능한 사랑 속에서 너무나 강렬한 빛깔과 오랜 향기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19 한국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시 소개) “어리석음이 어찌 덕이랴”. (1) 박태일의 시 , 「낙타 눈물」 (0) | 2021.05.16 |
---|---|
(명시 소개)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 (0) | 2021.05.14 |
(명시 소개) 정은정의 '내 친구 숙이' (0) | 2021.05.01 |
(명시 소개) 이동순의 시,「눈물의 세월」 (2) (0) | 2021.04.23 |
(명시 소개) 이동순의 시,「눈물의 세월」(1) (0) | 2021.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