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정은정의 '내 친구 숙이'

필자 (匹子) 2021. 5. 1. 10:11

백목련같이 화사한 시절 숙이를 만났다.

그녀는 일상에서 하냥 스치는 바람에 불과할 뿐

그 무엇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그녀를 만나게 된 날은

세상 소낙비에 맞아

온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되었던 날이었다.

처참한 물골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멈칫거리고 있을 때

먼저 환하게 맞아주며

젖은 옷을 닦아주던 숙이!

 

벼랑에 서 있을 때 그녀는 내게로 들어왔다

하루하루가 꽃샘추위였던 날들

그녀는 봄꽃이었다.

 

가슴에 용광로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녀에게서 뜨거워지는 법을 배웠고

뜨거움을 나누는 법도 배웠다

 

사랑의 반열

맨 앞에 숙이를 세운다.

 

정은정의 「내 친구 숙이」, 정은정: 내 몸엔 바다가 산다, 전망 2014, 58 - 59쪽.

 

나: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은정 시인의 작품 한 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너: 정은정 시인은 시작품 외에도 정갈하고 탁월한 시조들을 “출산 (出産)”한 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을 선정하였는지요?

나: 순간적으로 작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감정 처리가 꾸밈이 없는데도, 그냥 수월하게 읽히는군요.

너: 처음에 “숙이”는 시인의 친구, 다시 말해 어느 특정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는데, 자꾸 읽으니, 인 것 같고, 우리에게 희열을 안겨주는 존재처럼 여겨지는군요.

 

나: 재미있는 표현이로군요. “백목련처럼 화사한” 젊은 시절에 그녀는 수많은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요. 독일의 작가 귄터 드 브륀 (Günter de Bruyn)에 의하면 “사랑의 깊이는 사랑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적 조건에 의해서 측정된다.”고 합니다. 우정 역시도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그 깊이가 가려지겠지요? 시적화자가 “세상의 소낙비”에 맞아서 힘들게 살아갈 때, 숙이는 “젖은 옷을 닦아”준, 바로 그 도우미였습니다.

 

너: 아, 그래서 “꽃샘추위”에 시적 자아를 위로해준 “봄꽃”으로 비유되고 있군요.

나: 그녀는 시인을 위로해주었을 뿐 아니라, 따뜻한 열정 또한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가슴에 용광로를 가진 사람”으로 시인에게 “뜨거워지는 법”, “뜨거움을 나누는 법”을 가르쳐준 분입니다.

너: 살면서 이러한 친구, 이러한 “멘토어”를 한 사람이라도 지닌다는 것은 그 자체 행복일 것입니다.

 

나: 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여자이름을 “자”, “숙”을 많이 달았지요.

너: 숙 (淑)이라는 글자는 “정숙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아마도 가부장주의 사회의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 앞에서 고분고분하게 살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요즈음에는 “숙”으로 끝나는 이름을 지닌 젊은 여성은 거의 없지요.

나: 동감입니다. 과거에 여자는 순종적이어야 하고, 수그리며 살아야 한다고 간주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즈음에는 20대 처녀 가운데 “숙이”를 거의 찾을 수가 없네요.

 

너: 그렇다고 시인이 가부장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작품을 집필한 것 같지는 않는데요?

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독자로서 얼마든지 시인과 다르게 시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작품이 가부장주의의 순종적인 여성을 동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가부장주의의 순종적인 여성이 무조건 배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태도 역시 문제라면 문제일 것입니다. 순종적 여성에게도 부분적으로 장점이 있고,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여성에게도 권리를 쟁취해야 하는 굳은 신념이 있으니까요.

 

너: 무조건 대립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나: 그렇습니다. 상기한 시에서 중요한 것은 성 차이 내지 성 차별이 아니라, 배려와 양보 그리고 “용광로”와 같은 애틋한 정입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함께 살아가려면, 두 사람 가운데 누구라도 양보하고 배려하는 미덕을 발휘해야 하겠지요.

너: 오늘날 전근대적으로 순종하는 여성이 문제일 수 있지만, 이성을 배격하면서 일방적으로 다른 성을 적대시하는 태도 역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여성혐오 내지 남성 혐오라는 미움의 감정을 수정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미움과 질투는 사랑이 왜곡된 채 투사되어 나타나는 감정 아닌가요?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