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유리병 속에 시를 담는 마음으로
"그래 그때쯤이면 시집은 한 '십여년만'에 내면 좋을 것도 같아......
'여전히'라는 부사를 쓸 수 있었으면 해......
그래 내가 아꼈던 '섬세'라든가 '통찰'이라든가 '정갈'이라는 말이 정말 제값을 했으면 해......
'조용한 사랑'을 돌아보자는 것도 좋군......
조금은 식상하기는 하지만 표현 그대로의 '삶의 장면들'과 '사물의 모습'을 놓쳐서는 안 돼......
'깊고 따뜻한 성찰'이라는 말이나 '제 아름다움'이라는 말도 낡았지만 얼마나 소중한 말이란 말인가......"
(강은교 외: 유쾌한 시학강의 아인북스 2013, 289쪽에서 인용)
선생님, 잘 아시겠지요? 상처입은 느낌은 즐비하지만, 시구들은 정작 출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시구의 어설픈 배아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숨어 마치 가을의 낙엽처럼 이리저리 뒹구면서, 서서히 사라지며, 가슴앓이할 수밖에 없는 당사자를 은근히 원망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시인들만 특별히 "마음속 깊은 곳에 칼질을 당하는" (함석헌)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 (아니 감고) 바라보면 이 세상에서 하찮은 존재로 경멸당하는 사람의 찢긴 마음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어요. 이를테면 공장의 여직원에게도 애틋한 순정은 있는 법이지요. 시인은 그저 언어의 연금술적 능력만 더 갖추고 있을 뿐...
마음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낙엽들, 설령 마구 찢겨져 제 모습을 상실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여 움직일 힘조차 없이 죽어가는 귀뚜라미의 형상을 지닐지라도 나와 당신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 아련히 사라져가는 상처의 흔적을 건져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병통신술로서의 시 작업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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