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잔인한 낙향

필자 (匹子) 2020. 12. 16. 07:15

정약용의 제보은산방을 읽었습니다. 나 서로박은 짤막한 장편소설로 시인 정약용의 심경과 처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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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 정도로 잔인한 낙향은 아마 없을 것이다. J의 낙향이 그러했다. 기독교가 나라를 말아먹는 신앙으로 낙인 찍힐 무렵 셋째 형, 약종은 다만 우연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박애의 늪에 빠져들면서 종교적 희열에 서서히 감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유입된 기독교 신앙은 19세기 한반도에서 혹세무민하는 이단 종교로 박해 당하기 시작했다. 정씨 가족은 이름 있는 가문으로서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집안이었는데, 서양의 신비로운 신앙을 접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가문은 삼족이 멸하는 고초를 감수해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죽음을 면한 약전과 J, 두 형제는 한많은 땅, 전라남도 끝간 지역으로 터벅터벅 귀양을 떠나야 했다. 당시는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권력을 장악한 1801년 11월이었다. 이쯤 되면 청천벽력의 한으로 인하여 고난의 목숨을 사정 없이 끊어버려야 했지만, 이들을 호위하는 병정들은 그들이 스스로 목숨 끊을 자유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두 형제는 서로 만날 수도 없었다. 당국의 불호령으로 인하여 J는 강진 땅으로,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 끝자락으로 제각기 힘든 발길을 향했던 것이다. 더 살아야 무엇하랴. 세상은 나 한 사람이 목숨을 끊는 데 대해 눈 한번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아, 더 살아서 무엇하랴. J는 책 몇 권 담긴 작은 봇짐을 내려 놓고 절망적인 눈빛으로 산하를 내려다본다.

 

"우두봉 아래 작은 선방에는

대나무만 쓸쓸하게 낮은 담 위로 솟았구나

해풍에 밀리는 조수는 산밑 절벽에 부딪히고

읍내의 연기는 겹겹 산줄기에 깔려있네

둥그런 나물 바구니 죽 끓이는 중 곁에 있고

볼품없는 책상자는 나그네의 여장이라

어느 곳 청산인들 살면 못 살리

한림원 벼슬하던 꿈 이제는 아득해라"

 

牛頭峰下小禪房, 竹樹蕭然出短墻。
(우두봉하소선방, 죽수소연출단장.)
裨海風潮連斷壑, 縣城煙火隔重岡。
(비해풍조연단학, 현성연화격중강.)
團團菜榼隨僧粥, 草草經函解客裝。
(단단채합수승죽, 초초경함해객장.)
何處靑山未可住? 翰林春夢已微茫。
(하처청산미가주? 한림춘몽이미망.)

 

《제보은산방(題寶恩山房)》 전문

 

나를 저버린 것은 세상이구나. 가장 가까운 벗마저 내게서 멀어졌다. 고독은 저녁 어두움과 함께 J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 때, 일순 그의 뇌리를 스치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놀라운 말씀이었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라, 새로움으로 거듭나라는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어쩌면 주님의 말씀이었는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끔찍한 사화로 인하여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가족들의 단말마의 외침이었을까? 그 말씀, 그 외침은 자신에게서 권력에 대한 야심, 모든 종류의 명예욕이 자신에게서 사라지는 순간에 자신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라, 새로움으로 거듭나라. 그렇다면 이 말은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에도 나를 지탱해줄 수 있을까? J는 스스로 갱생하기로 작심한다. 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기이한 빛이 환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빛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자리하는 일련의 절망과 체념을 하나씩 상쇄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