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너: “응”.
나: “응”이라는 대답 속에는 동의가 숨어 있군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에는 주종 관계가 자리하는 반면에 “응”이라는 대답은 이와는 다른 것 같아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 그리고 동등한 관계를 연상시키니까요.
너: 요즈음 젊은이들은 카톡을 주고받을 때 응이라는 단어 대신에 그냥 동그라미 이응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응이라는 단어 속에는 수긍하고 동의한다는 의미가 은밀하게 내재해 있군요
나: 문정희 시인의 시 「응」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햇빛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너: “응”이라는 단어를 기호학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개의 이응 사이에 하나의 선이 그어져 있지요. 이것은 지평선 내지 수평선 위에 떠 있는 해와 달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합일은 해와 달의 결합으로 유추되고 있어요. 기호학적 차원에서는 시인의 지적이 매우 참신하지만, 사랑을 해와 달로 비유하는 경우는 이전에 참으로 많았습니다.
나: 예를 들자면, 어떤 게 있나요?
너: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해와 달의 삭망을 “성스러운 결혼식 ἱερὸς γάμος”라고 일컬었어요. 말하자면 해는 남성을 달은 여성을 상징하는데, 해와 달의 마주침은 그 자체 삭망으로서 사랑의 일치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나: 그러니까 개기일식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너: 네 그렇습니다. 성스러운 결혼식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가 일직선을 이룰 때에 한해서 나타났지요. 성스러운 결혼식으로서의 삭망은 이교도에 의해서 하나의 축제로 영위되었는데, 기독교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축제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남자는 그리스도의 몸 corpus Christi이고, 여자는 교회Ecclesia로 상징적으로 추상화되었어요.
나: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은 신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면, 교회는 신의 비밀을 품는 자물쇠로 의미변화를 이룬 셈이로군요.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서동시집에서 과거에 횡행했던 잃어버린 결혼식을 재론한 바 있지요?
너: 괴테의 시편에서는 하템과 술라이카라는 두 남녀가 등장하지요.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합시다. 일단 문 시인의 작품에 집중하기로 해요. 응이 “꽃처럼 피어난 문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자체 화답이기 때문입니다.
나: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은 그 자체 가장 평화로운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러한 결단은 누구의 간섭이나 명령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사랑이 자연스러우려면, 모든 만남을 이끄는 주체는 여성이어야 할 것입니다.
너: 문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겠군요. "응"은 가장 뜨겁고 평화로운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시어라고 말입니다.
나: 그렇다면 “응”은 과연 언제 어디서든 간에 조화롭고 아름다운 두 연인의 관계를 표현할까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박현수 시인은 문 시인의 작품을 바탕으로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났다는 문자
응
너는 동그란 해로 내 위에 떠있고
나는 동그란 달로 네 아래에 떠있어
눈부시다는 그 말
그러나 너와 나 사이
저 차가운, 가로놓인 선은 어쩌나
서로 사랑할 때조차
가장 깊이 다가갔을 때조차
살갗과 살갗 사이에
얇은 막처럼
서로를 구분하고 있는
저 자명한 경계는 어쩌나
아무리 끌어안아도
지워지지 않은 저 금은 어쩌나
관객은 다 들어도
배우만은 서로 못 들은 척하는 방백처럼
사랑은 저 넘을 수 없는 담을
못 본 체하는
너무나 오래된 게임인 것을 어쩌나
이 뻔한 방백을 우리가
너무 진지하게 말해왔던 것을 어쩌나
끝내 기의에 닿지 못하는
기표처럼 떠돌기 싫어서
슬쩍 없는 것처럼 해 두었던 것을 어쩌나
해를 삼키고
바다에 비친 해그림자도 삼키고
어둠을 가르는
저 수평선, 달아오른 칼날
내 위에 뜬 해도
그 아래에 뜬 달도 무릎 꿇리며
저 홀로 빛나는
저 눈부신 불사의 군림 (君臨)
세계에는 오로지 한 줄기 선만 남는다
땅 위에서 들은 마지막
계시의 말
응
(박현수: '응'이란 말, 실린 곳: 박현수: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울력 2015)
너: 박시인은 사랑의 갈망과 완성으로 향하는 “응”을 패러디하고 있군요.
나: 네, 라캉을 위시한 수많은 심리학자들도 지적한 바 있지만, 완전한 사랑의 결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두 영혼이 하나라는 생각은 인간이 갈망의 차원 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일지 모르지요. 이 점을 고려할 때 영원한 사랑은 하나의 허상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랑은 라캉이 말한 바에 의하면 항상 상호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오로지 어느 짧은 순간 에 한해서 동시적으로 오르가슴을 맛볼 수 있습니다.
너: 따지고 보면 해와 달이 서로 겹치는 것은 불과 몇 분으로 제한되어 있지요.
나: 그렇습니다. 사랑의 합일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게 사람들로 하여금 끝없이 좌절하게 하고, 그럼에도 절망적인 시지포스로 하여금 사랑의 돌을 굴리도록 작동하는 무엇입니다. 박현수 시인은 연인 사이에 온존하고 있는 구분 그리고 간극으로서의 “금”을 지적합니다.
너: 그렇겠지요. 사랑은 그 특징에 있어서 어쩌면 “방백”과 같습니다. 배우는 다른 배우가 곁에 서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발언을 관객에게 전할 때가 있지요. 그것이 바로 방백입니다. 제 3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할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 체 하면서 서성거리고 있는 등장인물을 생각해 보세요.
나: 그렇다면 사랑은 하나의 갈망의 차원에서 이해될 뿐, 성취의 순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엇일까요?
너: 주어진 현실에서 사랑은 시인에 의하면 “끝내 기의에 닿지 못하는 기표”일 뿐입니다. 사랑이라는 시니피앙이 사랑이라는 시니피에와 일치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바로 이러한 까닭에 박 시인은 두 개의 이응보다, 이응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정한 선, “수평선”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완벽한 사랑을 처음부터 가로막는 하나의 선 (線)을 “달아오를 칼날”이라고 표현합니다.
나: 박현수의 시 「‘응’이란 말」은 실제 현실에서 두 연인의 사랑의 성취를 차단시키고 가로막는 장애물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의 눈에는 “선”, “수평선”, “칼날”, “자명한 경계”가 안쓰럽게 비치고 안타까울 뿐이지요.
(계속 이어집니다.)
'19 한국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시 소개) 이동순의 시,「눈물의 세월」(1) (0) | 2021.04.23 |
---|---|
(명시 소개) 박현수의 시, 「‘응’이란 말」(2) (0) | 2021.01.17 |
잔인한 낙향 (0) | 2020.12.16 |
(명시 소개) 정끝별: 유리병 속에 시를 담는 마음으로 (0) | 2020.12.16 |
(명시 소개) 신철규의 시 "상처" (0) | 2020.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