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흐 117

블로흐: (2) 유토피아의 의미에 관하여

(앞에서 이어집니다.) 또한 동화들은 여러 과학 기술에 대한 가상적 기구들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동화 작가들은 마치 마술의 도구처럼 이러한 자연과학의 기구들을 그야말로 마력적으로 동화에 도입했던 것입니다. 「열려라, 식탁 Tischlein, deck dich」이라든가 진실로 지레에 의해 작동되는 요술 말 (馬) 그리고 날아가는 양탄자를 생각해 보세요. 알라딘의 소도구들은 인간의 욕망을 놀라울 정도로 성취시켜주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작동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오랫동안 이어온 소망을 충족시켜주지 않았습니까?  그래,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발명품의 목록은 자세히 언급된 과학 기술의 유토피아로서, 바로 지금까지 간행된 동화 속에 이미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습니다. 가령 베이컨..

29 Bloch 번역 2021.11.27

블로흐: (1) 유토피아의 의미에 관하여

우리는 밤에만 꿈을 꾸는 게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꿈을 꿉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꿈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꿈은 우리의 갈망으로부터 자극을 받는데, 이로써 우리는 이러한 갈망을 성취하려고 한다는 점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꿈들은 서로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낮꿈 속에는 자아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블로흐의 “낮꿈 (Tagtraum)”은 블로흐 철학의 전문용어로서 이상적 사고의 모티프를 제공하는 것이다. - 역주) 자아는 낮꿈 속에서 어떻게 활동할까요? 그것은 의식된 현실 상황 및 어떤 더 나을 것 같은 바람직한 미래상을 개별적으로 형상화하며, 이를 미래의 상황으로 제시합니다. 그렇기에 낮꿈은 밤에 꾸는 꿈과는 달리 내용상 한 바퀴 여행을 마치고 제 자리로..

29 Bloch 번역 2021.11.26

서로박: (1) 천일야화, 세계의 비밀과 사랑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사랑을 찾기 위한 인간의 계략: 그렇지만 귀를 틀어막는 행위는 참으로 기이할 뿐 아니라, 마치 패배를 선언하는 것과 같은 모티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혼자 감상하기 위해서 선원들의 귀를 틀어막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돛에 몸이 묶인 채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오디세우스는 자연에 대해 스스로 노예의 처지에 있다는 입장을 따랐습니다. (아도르노: 101). 이 대목에서 서구 음악의 병적이고도 심금을 울리는 특성 그리고 인간이 지니는 도구적 이성의 기본적 모티프가 간파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지략은 가령 어린아이들과 군인들이 마녀 혹은 어리석은 악마를 무찌르기 위해서 저지..

38 중세 문헌 2021.11.24

블로흐: 죽은 뒤에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 (3)

5. 셋째로 헤겔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마지막으로 헤겔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세계의 운동을 뜻한다고 하는 원의 둥근 움직임은 어떻게 이해되는가요? 헤겔은 세계의 변화를 정신의 원 그리기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명제는 반대 명제를 거쳐 종합의 단계로 향하는데, 결국 맨 처음의 출발점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움직임에 의하면 하나의 명제는 결국 어떤 더 높은, 더 구체적인 단계로서의 명제로 환원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나타나는 것은 비유적으로 말해서 마치 물이 폭포수처럼 아래로 강하게 떨어지는 경우만은 아닙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모든 현상은 모순과 결착되어 있는 폭포와 같은 무엇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헤겔 스스로 말한 바 있듯이 마치 굴을 헤집는 두더지의 행동처럼 출현하..

30 bloch 대화 2021.11.08

블로흐: 죽은 뒤에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 (1)

1. 죽은 뒤에 나눌 수 있는 대화 나: 블로흐 교수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죽음은 자신에게 하나의 행운이라고 말이지요.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죄에 관해서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텔레마코스 등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기회를 맞이한다면, 누구와 기꺼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까? 너: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자신의 목숨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사고의 연습이라든가, 단순한 희망 사항,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불멸성은 하나의 정언적 명제가 아니라, 아주 단순한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순진한 의미에서 한 남자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자존심 같은 ..

30 bloch 대화 2021.11.08

블로흐: 고향이란?

나: 그런데 고향의 개념은 당신의 철학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지방 내지 지역이라는 단어는 한편으로는 주어진 토양에 입각한 고향을 가리키는 지리적인 장소라는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지역과 지방은 한편으로는 편협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 그리고 한 장소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속물들을 떠올리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놀라운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완전히 도시화된 공간에서는 도저히 발견하기 힘든 특징이 아닐까요? 너: 고향은 나름대로 어떤 철학적 측면 내지 자신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독일 신비주의자인 에크하르트 선사가 언급..

30 bloch 대화 2021.10.23

모제스 로젠크란츠, 혹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쓰기 (3)

7.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울 첼란은 심리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표절 시비 때문이었다. 가령 이반 골 (Ivan Goll, 1891 - 1950)의 아내, 클레어 골은 첼란이 1953년에 간행된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서 죽은 남편의 시구를 마구 베꼈다고 주장하였다. 시적 표현들은 우연히 비슷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다른 작품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작품을 쓸 수도 있다. 굳이 잘못 아닌 잘못을 찾는다면 그것은 체험현실이 동일하다는 데에서 발견되는 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전후 독일 문학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시, 귄터 아이히 (Günter Eich, 1907 - 1972)의 「소지품 목록」이 체코의 시인 리하르트 바이너 (R. Weiner, 1884 - 1937)의..

22 외국시 2021.10.21

서로박: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

에른스트 블로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유토피아의 정신"은 20세기초의 유럽을 염두에 두면서, 시대 그리고 예술에 관한 명상을 반성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블로흐가 쓴 대부분의 글이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 짧은 단상으로 시작된다. 블로흐는 예컨대 항아리, 유리 그리고 가구 등과 같은 가시적이고 지엽적인 사물들을 다루면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해 나간다. 뒤이어 이어지는 논의는 예술에 대한 개념적인 해명이다. 블로흐는 예술을 철학적으로 논하면서 예술의 두 가지 특성을 일차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 하나는 예술의 “목적 형태 (Zweckform)”이며, 다른 하나는 “넘쳐흐르는 예술적 표현 (ausdrucksvolle Überschwang)”이다. 전자는 실천적 생산 원칙으로서 예술 작품을 생산하게 된 예술..

27 Bloch 저술 2021.09.23

블로흐: 이 시대의 유산 (2)

유산에 관한 이러한 문제는 나의 책 『이 시대의 유산』에서 하나의 중요한 관건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책에서 나는 유산의 문제를 네 개의 작은 시기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우선 제시되는 것은 분산의 경향입니다. 직장 고용인들의 산만한 의식이라고 할까요, 세상은 우스꽝스럽고 긴장감 넘치며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지요. 이러한 문화는 특히 영화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어떤 붉은 감정의 덩어리가 출몰합니다. 혁명의 광채 내지 이른 광채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침 여명, 혹은 저녁의 황혼이 도래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는 1920년대 베를린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가 바로 분산의 시기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문화적으..

30 bloch 대화 2021.09.13

블로흐: 이 시대의 유산 (1)

나: 당신의 책 『이 시대의 유산』은 1920년대 독일 사회를 심도 넘치게 분석하고 있는데, 1935년 당신에 스위스에 망명할 당시에 뒤늦게 간행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신의 문헌을 어떻게 수용했는지요? 너: 그야말로 다양하게 수용되었습니다. 호평과 악평이 공존했다고 할까요? 이러한 모순적인 반응은 가장 중요한 명제인 유산의 문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인 것 같습니다. 유산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라든가 경제 숙명론과 같은 특성을 유추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개념 자체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요. 나는 유산을 이후 세대에게 부여하는 문화적 상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상속으로서의 유산의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30 bloch 대화 2021.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