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죽은 뒤에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 (1)

필자 (匹子) 2021. 11. 8. 11:10

1. 죽은 뒤에 나눌 수 있는 대화

 

나: 블로흐 교수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죽음은 자신에게 하나의 행운이라고 말이지요.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죄에 관해서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텔레마코스 등과 같은 걸출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기회를 맞이한다면, 누구와 기꺼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까?

 

너: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자신의 목숨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사고의 연습이라든가, 단순한 희망 사항,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불멸성은 하나의 정언적 명제가 아니라, 아주 단순한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순진한 의미에서 한 남자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 말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백과사전 학파에 속하는 물질 이론가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내가 쌓아온 지식에 대해 충분할 정도로 흡족해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세상에 내가 없더라도 잘 돌아가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견 순진한 체념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그의 발언의 여운은 어쩌면 논리학에서 말하는 “궤변 subreptio”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내가 쌓아온 지식에 대해 나는 충분할 정도로 흡족해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세상은 내가 없더라도 잘 돌아가리라고 믿어요.” 이 말 속에 도사리고 것은 하나의 갈망이라기보다는, 지식인 당사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어떤 체념 내지 예견된 자기 이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다른 유머러스한 의미를 도출해낼 수 있어요. 죽음을 앞두게 된 불쌍한 늙은 사람은 “그래, 지금까지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 다른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제는 웃을 수밖에.” 더 이상의 삶이 없다면, 그는 그냥 웃을 수 있다니, 이건 두 가지 사항을 서로 뒤섞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인용한 계몽주의자의 발언은 기이한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답과 관련된 사항은 기계적 유물론, 다시 말해 물질주의가 횡행한 18세기의 시대에도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광기로서의 갈망을 의미할 뿐 아니라, 도덕적 문제에 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대답을 안겨줄 수 있는 갈망의 장소를 지적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2. 죽은 뒤의 대화를 말하는 것은 하나의 궤변일 수 있다.

 

가령 미하일 아르치바세프Michail Arzybaschew의 장편 소설을 예로 들겠습니다. 장편소설 『사닌Ssanin』에는 삶에 관한 기이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 “사닌”은 처음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가로서 용기했게 활동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05년 러시아에서 발발한 혁명 운동에 가담한 바 있는데, 이때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활동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혁명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실망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은거하며 살았지요. 이후에는 자신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소일했습니다. 어느 날 과거의 동지들 그리고 그를 애호하던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서 안타까운 듯이 왜 그렇게 사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그는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지요. “너희들 자신에게 물어봐. 왜 내가 언제 교수형 당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계속해야 하지? 내가 혁명적 과업에 목숨을 건다고 해서, 먼 훗날 32세기의 노동자들이 배부르게 먹고, 심리적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갈 것 같아?”

 

멀리서 찾아온 친구들은 사닌의 입에서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말이 나올 줄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질문에 그들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사실 사닌은 마음속으로 생각한 바를 발설했을 뿐입니다. “그 따위 힘든 과업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따위 혁명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싶지 않다. 내가 어째서 그러한 일로 인하여 나중에 교수형당해야 하는가?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죽은 뒤에도 어떤 삶이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찬란한 승리 또한 자리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사닌은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관망하게 될 것입니다. 즉 32세기의 노동자들이 아무런 부족함 없이 배불리 먹고,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어쨌든 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무엇에 관한 두 가지 질문입니다. 행복한 삶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동경,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염세주의와 체념이 뒤섞인 냉담함을 부추기는 질문들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결코 한 가지 해답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은 뒤에 아무런 구별 없이 버러지들의 전리품으로 썩어갈지 모릅니다. 죽은 자를 위한 설교는 무덤 속의 구더기들의 식사를 위한 말씀과 별반 다름이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