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유토피아의 의미에 관하여 (3)

필자 (匹子) 2021. 12. 2. 10:41

(앞에서 이어집니다.)

 

그밖에도 여러 종교들이 추구하는 신비로운 갈망 내지 기독교의 신비로운 희망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들은 죽음에 대항하는 상을 너무나 다양하게 설계하고 있으며, 종교 고유의 유토피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휴머니즘의 놀라운 의향은 이러한 믿음의 유토피아를 통해서 더욱 위대함을 표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밖에 철학이 사변적이라는 점은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철학자들은 결코 경험적인 분야를 연구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아직 아닌 존재das Noch-Nicht-Sein”에 관하여 핵심적으로 추적하지 않았던가요? 철학은 아직 아닌 존재가 어떻게 활동하고, 무슨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탐색하며, 그것이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제반 꿈들에 관하여 특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꿈의 설계는 단순한 개인적이고 사적인 “갈망하는 사고 wishful thingking”로부터 떠나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것과 공통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상주의적인 것과 유토피아적인 것을 철저히 구분해야 합니다. 전자는 오로지 머릿속으로 구체적인 현재의 현실을 향상시키려고 이 현실에 직접 추상적으로 접근합니다. 이에 비하면 후자는 구체적인 현재의 현실을 직접 다루는 게 아니라, 어떤 외부의 사회 체제를 끌어들입니다. 이상주의의 태도는 현실 전체를 조망하여, 그것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를 (다르게 추상화하여) 파악하는 어떤 경험주의의 태도를 개의치 않게 생각할 것입니다. (블로흐는 이 대목에서 어떤 부정적인 의미로 파악되는 “비현실적이고 가능성이 희박한 일면”으로부터 유토피아의 개념을 구분시키고 있다. “유토피아적인 것 das Utopische”은 미래 지향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역동성 그리고 개방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가능성이 희박한 “유토피아적인 것”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역주)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은 오직 다음과 같은 입 장에서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즉 유토피아가 실재하는 세부적 사항을 있는 그대로 다루지 아니하고, 그것을 건너 뛰어넘고 있다는 입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블로흐의 이러한 발언은 보충 설명을 요한다. 유토피아는 주어진 구체적 현실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의 상은 어떤 새로운 (혹은 가상적인) 사회로 투영되고 있다. 그런데 유토피아는 근본적으로 주어진 현실의 제반 모순점을 개혁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다. 유토피아는 현실적 부조리 혹은 모순점을 직접 비판하지 않고, 그것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 역주) 흔히 영리하다고 자부하는 사업가는 “그것은 이상적이다.”라고 말하며 유토피아를 폄훼하지 않았던가요? 그리하여 유토피아의 개념은 통째로 그렇게 매도당함으로써 지루한 상투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유토피아를 부인하는 이러한 태도 속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유토피아는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철저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특히 사회 유토피아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하는 사회의 경향성이나 가능성을 설계한다는 것은 제대로 전달될 리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사회 유토피아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반드시 추상적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기존하는 사회의 경향성과 경향성이 끝나는 시기를 전제로 할 때 너무 일찍 출현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유토피아의 창안자들은 그들의 가슴과 머리에 떠오르는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을 아무런 중개 없이 끌어내었던 것입니다. 엥겔스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유토피아의 기본적 틀을 세우는 작업에 있어서 기껏해야 이성에 호소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자신이 처한 시대에 직접적으로 호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Siehe Friedrich Engels: Dei Entwicklung des Sozialismus von der Utopie zur Wissenschaft, in: MEW. Bd. 19, Berlin 1969, S. 177 - 228. Hier S. 200f. - 역주)

 

이러한 사항은 결코 세상을 등지지 않은 사회 유토피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가령 작은 규모의 연방주의로 방향을 설정한 오언Owen과 푸리에Fourier, 중앙집권적 국가의 설계로 방향을 설정한 생시몽Saint Simon 등을 생각해 보세요. 또한 그것은 대부분의 사회 유토피아에서 나타나는 바, 세상을 등진, 진실한 휴머니즘에도 해당됩니다. 물론 사회 유토피아에서 드러나는 휴머니즘이 기존하는 세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사회 유토피아는 기존하는 세상을 더욱 심하게 비판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사회 유토피아 속에는 주어진 구체적 현실과 어긋나는 점이 많이 도사리고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까지 “멀리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경시해 왔다. 그러나 블로흐는 이와는 정반대되는 견해를 제기한다. 즉 사회 유토피아가 기존하는 현실과 분리되거나 동떨어져 있으면, 그럴수록 우리는 사회 유토피아의 시대 비판이 더욱 신랄하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 유토피아 속에 등장하는 새로운 사회상은 주어진 기존 현실이 그만큼 더 철저하게 변화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고: D. Riesmann: Some Observation on Community Plans and Utopia, in: Individualism reconsidered, Glancoe 1964, PP. 70 - 98. - 역주) 그것은 정의로움을 위한 사고에 필연적이며, 이를 결실 맺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엥겔스는 (나중에 시민주의의 유토피아를 형태화시킨 사람들이 휴머니즘을 그렇게 정확하게 수용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오언, 푸리에 그리고 생시몽의 경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습니다. “그것들 (오언, 푸리에 그리고 생시몽 등의 사회 유토피아 - 역주)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그 속에 담긴 어떤 독창적인 사고의 싹은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푸리에는 ‘기존하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고 있으며, 생시몽은 ‘먼 미래까지 투시하는 독창적 시각’을 보여주었고, 나중의 사회주의자들의 거의 모든 경제적 견해들은 이미 그 속에 하나의 싹으로 담겨 있을 정도이다.”

 

이로써 사회 유토피아가 틀림없이 추상성을 띄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과장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개혁하려는 모든 사회 유토피아가 제각기 어떤 차 시간표를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엥겔스의 발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유추할 수 있다. 즉 먼 훗날의 사회주의자들의 분명한 사고는 비록 막연하지만 생시몽의 유토피아에서 엿보이고 있다. 따라서 비록 과거의 사회 유토피아가 추상적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미래의 삶에 관한 구체적 사고라는, 어떤 독창적인 사상의 싹이 감겨 있다는 것이다. - 역주) 과거의 유토피아들은 미래의 사실을 예측해서 꿈꾸었으며, 현재를 추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당대와 묘한 뉘앙스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사회 유토피아들은 당대의 사회상과 최소한 부정적인 방식으로 관련성을 맺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마치 이데올로기처럼 기존 사회의 지배층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찬양하는 일을 반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사회유토피아들은 이제야 뜻을 관철시키는 새로운 계급을 위하여 어떤 미래의 건물을 마련한 셈입니다.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먼 미래에 새로운 계급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자로서, 때로는 휴머니스트와 같은 행동하는 건축가로 작용했다고나 할까요. 위대한 이상주의자들은 도래할 사회를 이끌어나갈 임무를 부여받은 채 제각기 다음 세대에 나타날 경향성에 관해서 발언했던 것입니다.

 

사회 유토피아들은 기존의 지배적이었던 관심사가 아니라, 다가올 새로운 관심사를 수용하였습니다. 이를테면 토머스 모어는 보다 자유로운 시장의 제도를, 캄파넬라는 절대적으로 활성화되어야 하는 매뉴팩처의 시대를, 생시몽은 산업에 관한 새로운 마력을 사회적으로 활용하려는 놀라운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구체적으로 변한 사회 유토피아를 논외로 하더라도, 추상적인 유토피아 역시 비현실적인 공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설령 유토피아를 미친 생각이나 분노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꿈나라Wolkenkuckucksheim”라고 명명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유토피아의 차 시간표는 여기서 원칙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의 양심과 지혜는 실제 주어진 사실들에 의해서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로써 그것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영리해지지만, 동시에 영리해지지 않습니다. 유토피아의 양심과 지혜는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제각기 “현존하는 것 das Seiende”의 단순한 힘에 의해서 반박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입니다. 만약 인간이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유토피아는 실제로 “현존하는 것”을 반박하고,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수정합니다. (여기서 “현존하는 것”은 하이데거가 파악하려고 하던 존재론적인 개념이 아니라, 특수한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삶의 공간”을 가리킨다. - 역주)

 

(뒤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