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죽은 뒤에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 (3)

필자 (匹子) 2021. 11. 8. 11:12

5. 셋째로 헤겔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마지막으로 헤겔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세계의 운동을 뜻한다고 하는 원의 둥근 움직임은 어떻게 이해되는가요? 헤겔은 세계의 변화를 정신의 원 그리기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명제는 반대 명제를 거쳐 종합의 단계로 향하는데, 결국 맨 처음의 출발점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러한 변증법적 움직임에 의하면 하나의 명제는 결국 어떤 더 높은, 더 구체적인 단계로서의 명제로 환원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나타나는 것은 비유적으로 말해서 마치 물이 폭포수처럼 아래로 강하게 떨어지는 경우만은 아닙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모든 현상은 모순과 결착되어 있는 폭포와 같은 무엇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헤겔 스스로 말한 바 있듯이 마치 굴을 헤집는 두더지의 행동처럼 출현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자신이 태어나기 직전의 상태, 다시 말해서 어머니의 자궁 속의 상태를 기억해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마치 성스러운 영혼이 태아에게 진리를 전해주는 행동과 같습니다. 즉 성스러운 영혼은 맨 처음 3개월 동안에는 진리의 아랫부분을, 그 다음 3개월 동안에는 진리의 중간부분을, 마지막 3개월 동안에는 진리의 마지막 부분을 알려준다는 것이지요. 이는 분명히 “재 기억Anamnesis”의 이론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의 목표는 원이 그려지는 방향으로 향합니다. 시작은 마지막으로 치닫는 게 아니라, 원 그리기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이 원래 머물고 있던 근원의 장소로 되돌아간다고 합니다. 따라서 헤겔의 철학은 말하자면 “새로운 무엇Novum” 다시 말해서 “미래”를 위한 어떠한 자리도 마련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헤겔은 미래를 마치 바람과 같은 무엇 내지 불면 어디론가 흩어지는 “왕겨Spreu”와 같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마치 원처럼 빙빙 도는 세계의 움직임은 어느 순간 그가 추구하던 절대적 특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명망 높은 헤겔 교수가 베를린 대학 앞에서 사륜마차에서 내려, 강의실로 들어서면서 자기 자신을 세계영혼의 비서라고 자처하던 그 순간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논할 때 “새로운 무엇”은 과연 어디에서 본연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천국에 거주하는 수많은 학자들은 분명히 바로 이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골몰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부족한 게 많은 학자입니다. 저세상에 가면, 어쩌면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숭고하고 용맹스러운 사람들로부터 어떤 적절한 대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의 짧은 인생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든가 조그만 단초라도 주어지지 않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