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흐 117

블로흐: 놀라움

“생각해 보세요, 나는 가끔 푸른빛을 발하는 파리 한 마리를 바라봅니다. 네,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말처럼 들리겠지요. 어쩌면 내 말이 이해될지 모르겠어요.” - “웬걸요, 잘 이해합니다.” - “네, 네. 이따금 나는 풀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풀 역시 나를 바라볼 수도 있어요, 우리가 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요? 풀줄기 하나를 골똘히 바라봅니다. 놈은 가볍게 몸을 떨고 있어요 이 순간 그것은 어떤 무엇이라고 생각되지요. 내 곁의 무엇을 생각합니다. 여기 풀줄기 하나가 서서 몸을 떨고 있다고요! 내가 바라보는 것은 가문비나무일 수 있어요. 나무는 가지 하나를 지니고 있지요. 나무 가지는 나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하게 하지요. 그렇지만 산정에서 사람들도 바라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 “..

28 Bloch 흔적들 2021.02.05

블로흐: 은폐된 위대한 인간성 (3)

이야기에 등장하는 기인은 처음에는 잘못된 것 같으며, 어떤 증상을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마치 수수께끼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치자크 라이프의 외적인 모습이라든가 평소의 행실 또한 어떤 놀라운 품격을 보여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서 성자에게서 엿볼 수 있는 선하고 훌륭한 특징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최상의 경우 그가 삶에서 어떠한 결실을 맺을지를 유추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장삼을 타고 물위로 방황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증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 위의 여행은 랍비들의 카발라 세계에서는 주지하다시피 놀라울 정도의 마력적 초능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스러움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없다. 톨스토이의 인민 동..

28 Bloch 흔적들 2021.01.01

서로박: 만인의 자유와 평등. 3.

4. 블로흐는 시민사회에서의 제반 법학이론이 하나의 권력이데올로기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시민주의 문화와 예술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부분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훌륭한 성분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법학의 대부분의 내용은 파기 대상으로 간주되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법학이 권력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나타납니다. 젊은이들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서 법학을 전공하지만, 나중에 어처구니없게도 법학 전공자라는 선민의식과 신분상의 특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자고로 힘은 개인보다는 그룹으로, 그룹보다는 국가로 쏠립니다. 인간의 욕망은 권력과 금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향하는 내향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블로흐는 역설적으로 약간의 편향적 자..

27 Bloch 저술 2020.12.03

서로박: 만인의 자유와 평등. 1

자연법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한다. - “법의 눈은 지배 계급의 얼굴에 박혀 있다.” (블로흐) - “법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 (성당)의 유리창과 같다. (박설호) - “자연법의 정신은 행하는 규범 (norma agendi = 공권력)가 아니라, 행하는 능력 (facultas agendi = 촛불집회)에서 발견된다.” (블로흐) 1. 친애하는 K, 감옥에는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부자와 권력자들이 죄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마전에 머무는 경우는 잠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국가에 관하여 De civitas Dei』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배 한 척 가지고 도둑질하므로 해적이라 불리지만, 당신은 큰 함대를 가지고 도둑질하므로 황제라고..

27 Bloch 저술 2020.12.03

서로박: 프리츠 루돌프 프리스의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

친애하는 F, 오늘은 프리츠 루돌프 프리스 (Fritz Rudolf Fries, 1936 - )의 문학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프리스는 1936년에 에스파냐의 빌바오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에스파냐의 파르티잔에 체포되어 총살당했습니다. 1942년 가족들은 라이프치히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그의 이력은 “에스파냐라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동독이라는 전체주의 국가로 이주한 삶”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프리스의 뇌리에는 유년의 참혹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즉 40년대 초 연합군에 의해서 처참하게 폭격당한 라이프치히가 바로 그 상흔이었습니다. 프리스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영문학 그리고 에스파냐 문학을 전공하였..

45 동독문학 2020.11.27

블로흐: 버스 안에서 스친 사랑

친구는 파리의 공항버스를 타고 있다. 버스는 플라스 드로페라 가(街)에서 파르크 몬소리 가(街)까지 운행하는데, 그의 앞에는 여자가 앉아 있다. 친구는 여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연한 하늘색 눈을 지닌 여자는 친구와 지인 사이의 대화를 조용히 엿듣고 있다. 어쩌면 대화의 내용에 주의하지 않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미의 눈은 꼼짝하지 않은 채 친구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녀는 내심 아무 것도 갈구하지 않는지 모른다. 그미의 둥근 눈동자는 마치 별처럼 고적하게 깜박거리며 남자를 향하고 있다. 이때 남자는 냉담한 태도를 취한다. 그미가 행여나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이를 감당하지 못할 거야. 대부분 남자들은 여성이 적극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드러낼 때 어쩔 줄 모른다. 어떻..

28 Bloch 흔적들 2020.11.17

블로흐: 미라보 백작 (2)

하인의 신분에서 주인의 신분으로 비약하여, 가난을 일거에 떨치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보기 드문 특수한 형태일 것이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등장하는, 솥 수선공 크리스토프 슬리가 바로 이러한 유형의 인물에 해당한다.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1594)는 셰익스피어의 2막 희극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파도바의 부자 밥티스타의 두 딸, 카타리나와 비엔카 그리고 어느 미망인 여인이 그들이다. 카타리나는 난폭하여 어떤 남자도 청혼하지 않는데, 페트루치오는 그미를 일단 자신이 고안한 훈련을 통해서 카타리나를 길들인다. 나중에 세 신부 가운데 신랑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여자는 카타리나로 밝혀진다...

28 Bloch 흔적들 2020.10.13

블로흐: 미라보 백작 (1)

유복하게 생활하는 한 사내는 어느 날 비참할 정도로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때 어떤 상념이 사내의 뇌리를 스쳤다. 그의 걸음걸이는 자신의 걸음과 비슷하며, 어깨가 흔들리는 모습 또한 자신의 것과 유사했다. 심지어 얼굴의 생김새도 거의 동일했다. 이순간 사내는 어떤 착각에 사로잡힌다. 어쩌면 그 남자의 모든 것이 나의 육체이며, 나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 어떤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삶이 꼬이지 않았더라면, 그는 마치 내 동생처럼 편히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황당한 사건은 주어지지 않았다. 우연히 주위에서 피리소리가 들린다 하더라도 남자는 몸을 비비꼬며 춤춘 적도 없었다. 불쌍한 그 남자는 -흔히 선한 사람들이 말대로 오로지 인간적으로 고..

28 Bloch 흔적들 2020.10.13

서로박: 프리드리히 볼프의 '맘록 교수'

오늘은 구동독에서 브레히트와 함께 쌍벽을 이루던 극작가 프리드리히 볼프 (Friedrich Wolf, 1888 - 1953) 그리고 그의 극작품, 「맘록 교수 (Professor Mamrock)」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브레히트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지만, 프리드리히 볼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우리나라에서 전무한 실정입니다. 특히 전통적 형식의 연극 이론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그는 브레히트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은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극적 형식이 아닌가요? 따라서 이 자리에서 프리드리히 볼프의 문학을 언급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프리드리히 볼프는 극작가로서 활동한 것 외에도 의사로 활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구동독의 안기부장, 마르쿠스 볼프 (Ma..

43 20전독문헌 2020.09.18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1)

“솔로몬이 말하기를 지상에는 새로운 것은 없다. .” (Francis Bacon)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은 -플라톤의 ‘재 기억 (Ανάμνησις)’처럼- 과거 사항에 의존해 있었다. 이제 새로운 지식은 미래 사항에 의해 식별되어야 한다.” (Ernst Bloch) 1. 부정적 종말론과 반 유토피아: 인용문은 그 자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재 기억 이론은 전통적 학문 연구의 바탕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과거 지향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 행위는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과거 있었던 원초적 상을 추적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떠한 창조도, 변화된 미래도 용인될 수 없습니다. 모든 새로움은 본질적으로 망각이요, 지식이란 잊힌 것들로부터 떠올..

34 이탈스파냐 2020.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