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이어집니다.)
또한 동화들은 여러 과학 기술에 대한 가상적 기구들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동화 작가들은 마치 마술의 도구처럼 이러한 자연과학의 기구들을 그야말로 마력적으로 동화에 도입했던 것입니다. 「열려라, 식탁 Tischlein, deck dich」이라든가 진실로 지레에 의해 작동되는 요술 말 (馬) 그리고 날아가는 양탄자를 생각해 보세요. 알라딘의 소도구들은 인간의 욕망을 놀라울 정도로 성취시켜주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작동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오랫동안 이어온 소망을 충족시켜주지 않았습니까?
그래,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발명품의 목록은 자세히 언급된 과학 기술의 유토피아로서, 바로 지금까지 간행된 동화 속에 이미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습니다. 가령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 Nova Atlantis』는 이러한 목록을 체계화시키고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사회적이고 지정학적인 그리고 기술적인 유토피아는 이미 동화 속에 구현되어 있습니다. 동화 속에는 항상 갈망의 상이 서로 헝클린 채 감추어져 있지요. 그렇기에 유토피아의 요소는 지금까지의 국가소설이나 국가에 관한 이야기의 차원에서 나타난 것보다 더 많은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유토피아의 개념을 더 이상 축소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설령 사이언스 픽션이 유토피아의 성분을 확장시켰다고 하더라도 사이언스 픽션이 유토피아의 요소 가운데 일부분만을 포함하고 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블로흐가 파악하는 유토피아의 개념은 보다 포괄적인 카테고리로 확장되고 있다. 유토피아란 블로흐에 의하면 국가 소설 속의 사회 유토피아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이언스 픽션의 기술적 가능성을 포괄하고 있다. 게다가 낮꿈이라든가, 개별적 인간의 사적인 욕망 역시 유토피아의 개념에 포함된다. 국가 소설에 묘사된 사회 유토피아가 유토피아의 모델이라면, 동화 내지 사이언스 픽션에 담겨 있는 제반 갈망은 유토피아의 성분으로 규정될 수 있다. - 역주)
나아가 새로운 사물을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그것이 언젠가 발효되리라고 믿는 어린이 그리고 청년들의 의식을 생각해 보세요. 또한 사회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거대한 변모를 이루는 시대, 정신적 창조의 제반 현상들을 고려해 보십시오. 그밖에 과거에 한 번도 존재하지도 한 번도 본적이 없던 나라들이 실제로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추측컨대 블로흐는 아마도 20세기 초에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한 듯하다. - 역주) 우리가 지금까지 한 번도 바라보지 못했던 유토피아의 문제. 유토피아의 카테고리 그리고 유토피아의 영역은 불현듯 현실로 화하지 않습니까?
유토피아의 성분은 낮꿈 속에서 스쳐가는 생각과 전혀 일치되지 않으며, 반드시 일치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동화 속의 내용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물론 동화 속에는 우리를 감동시키는, 그렇지만 대수롭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을 뿐입니다. 동화들이 사회 유토피아의 주변에 위치하므로, 유토피아의 영역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 단락에서 블로흐는 유토피아의 영역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회 유토피아는 주로 국가 소설에 묘사된 바람직한 국가 내지 사회의 상을 가리키는데, 이것만이 유토피아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토피아 가운데에는 사회상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유형, 이를테면 개인적 심리적인 상 내지 과학 기술에 관한 바람직한 상도 있을 수 있다. - 역주)
물론 사회 유토피아는 모든 유토피아의 문한 속에 거의 고정적으로 담겨 있을 정도로 유토피아의 핵심을 이루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것은 전 인류의 문화 내지 (인간에 종속되지 않는) 자연에 대해서도 기능하고 있습니다. 제반 인간 삶을 고려할 때 사회 유토피아 뿐 아니라, 수많은 지엽적인 상들이 유토피아의 진열장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이 희망하는 거울 속의 어떤 상이라든가, 바람직한 생산 현장, 여행을 통해서 얻어낸 상 등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가상적이기는 하나 초월적인 인간형은 아직 현실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문학 작품에서 이미 다루어지지 않았던가요?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의 「일곱 개의 전설」에 나오는 가난한 기사 첸델발트, 게르하르트 하웁트만Gerhart Hauptmann의 『그리고 피파는 춤춘다.Und Pipa tanzt!』에 등장하는 유리 장인, 미하헬 헬리겔 등을 생각해 보세요. 특히 헬리겔은 몸은 약하지만, 엄청나게 거대한 상상력을 지니지 않는가요? (이 단락에서 블로흐는 유토피아의 영역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사회 유토피아는 주로 국가 소설에 묘사된 바람직한 국가 내지 사회의 상을 가리키는데, 이것만이 유토피아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토피아 가운데에는 사회상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유형, 이를테면 개인적 심리적인 상 내지 과학 기술에 관한 바람직한 상도 있을 수 있다. - 역주) 또한 우리는 돈 지오반니와 파우스트 그리고 무언가를 경고하는 인물 돈키호테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유토피아의 영역에 관한 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의학적, 과학 기술적, 건축학적 그리고 지리학적 특징으로 유토피아의 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설령 사회 유토피아라는 작은 카테고리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반드시 사회에 관한 것만 담겨 있지는 않습니다. 사회 유토피아는 한편으로는 어떤 가능한 인간의 행복을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법사상으로 설계된, 인간의 어떤 가능한 품위 또한 반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전망의 차원보다는 틀림없이 우리 자신의 존재와 직결되는 문제를 고려한다면, 사회 유토피아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윤리적 기본 강령이라든가, 이상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나아가 공간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비장소의 영역으로서의 음악의 중요성이 사회 유토피아 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뒤에 계속됩니다.)
'29 Bloch 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로흐: (4) 유토피아의 의미에 관하여 (0) | 2021.12.03 |
---|---|
블로흐: (3) 유토피아의 의미에 관하여 (0) | 2021.12.02 |
블로흐: (1) 유토피아의 의미에 관하여 (0) | 2021.11.26 |
블로흐: 실증주의 비판 (0) | 2021.10.08 |
호르스터: 블로흐의 사상 (3) (0) | 2021.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