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유토피아의 의미에 관하여 (1)

필자 (匹子) 2021. 11. 26. 10:59

우리는 밤에만 꿈을 꾸는 게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꿈을 꿉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꿈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꿈은 우리의 갈망으로부터 자극을 받는데, 이로써 우리는 이러한 갈망을 성취하려고 한다는 점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꿈들은 서로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낮꿈 속에는 자아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블로흐의 “낮꿈 (Tagtraum)”은 블로흐 철학의 전문용어로서 이상적 사고의 모티프를 제공하는 것이다. - 역주) 자아는 낮꿈 속에서 어떻게 활동할까요? 그것은 의식된 현실 상황 및 어떤 더 나을 것 같은 바람직한 미래상을 개별적으로 형상화하며, 이를 미래의 상황으로 제시합니다. 그렇기에 낮꿈은 밤에 꾸는 꿈과는 달리 내용상 한 바퀴 여행을 마치고 제 자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흔히 밤에 꾸는 꿈은 억압된 심리적 체험이나, 그 체험의 내면으로 회귀합니다.

 

이와는 달리 낮꿈은 가급적이면 모든 방해나 억압을 떨쳐버리고, 오직 앞으로 나아갑니다. (블로흐의 낮꿈은 프로이트의 꿈의 기능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차이점을 시사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꿈은 성취되지 않은 리비도의 억압과 관련된다. 그것은 인간의 성욕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 (Die Traumdeutung)』을 통하여 개별적 인간의 심리적, 성적 억압을 근원적으로 추적하여 심리적 불안 내지 병을 치료하려고 하였다. 이에 비하면 블로흐는 프로이트의 과거 지향적 방향을 인정하지 않는다. 블로흐의 낮꿈은 “스스로 이루지 못하는 불가능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낮꿈을 꾸는 자의 관심사는 미래로 (블로흐의 표현을 빌면) “앞으로 (Vorwärts)”향하기 때문이다. 낮꿈은 정신분석학이 의도하는 심리학적이고 성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으로 확장되고 개방적으로 발전된다. - 역주) 다시 말해 낮꿈은 “더 이상 의식될 수 없는 무엇”을 다시 신선한 기억으로 떠올리는 게 아니라, 인간 삶과 이 세상에서 “아직 의식되지 않은 무엇”을 상상력을 통해 발견해냅니다.

 

낮꿈은 우리가 흔히 산책을 할 때 그리고 조용히 휴식을 취할 때 공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공상은 때로는 극단적 대담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게 공허한 까닭은 이것저것 자세하고도 깊은 사려 끝에 창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요, 그게 극단적인 까닭은 자유롭게 생각하는 데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린아이들은 커다란 선물에 대한 꿈으로 부풀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나중에 위대한 인물이 되리라는 갈망을 품거나 미래에 만나게 될 아름다운 연인을 생각하면서, 달콤한 기대감을 견지합니다.

 

그렇습니다, 푸른 낮꿈들은 (당하고 사는 자의) 승리감 내지 앙갚음으로부터 (가난한 자의) 마치 황금으로 수를 놓은 것과 같은 거울 속에서 휘황찬란하게 중첩되어 있는 풍요로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블로흐가 낮꿈을 푸르다고 비유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푸른색이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그러하다. 낮꿈은 이미 현실에 주어져 있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게 아니며, 어떤 보다 나은 현실의 새로운 (때로는 가상적인) 사물을 추적해 나간다. 그러므로 그것은 꿈꾸는 자가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결국 미래로 향하여 진행해 나간다. 이러한 특성은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의 「푸른 꽃 die blaue Blume」과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의 「푸른 말 (馬)」 등의 작품과도 관련된다.- 역주)

 

어디 그뿐일까요? 낮꿈의 형상들은 이 세상을 더 낫게 변화시키려는 (뜻있는 자의) 계획을 생략하지 않고 있습니다. 낮꿈은 무언가를 예견하는 귀중한 자아 자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낮꿈은 자아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의 고결한 갈망을 포괄한다. - 역주) 낮꿈 속에는 꿈꾸는 자의 어떤 열광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이 열광 때문에 꿈꾸는 사람은 제반 수단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개의치 않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열광이란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긴장시킬 뿐 아니라, 우리가 실현 가능한 무엇을 추구하고 전진해 나가도록 도와줍니다.

 

만약 낮꿈이 스스로의 가상에서 벗어나게 되면, 실현 가능하고 전진하는 특성을 더욱더 분명히 보여줍니다. 낮꿈은 형체로 드러난 어떤 가상을 추적하지만, 바로 거기에는 어떤 사회적 임무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낮꿈을 꾸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는 착상, 휘황찬란하게 얽힌 상념들 그리고 어리석은 자를 매료시키는 내용 등을 하나의 찬란한 상으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상은 때때로 U라는 글자를 X로 뒤집어서 몽한 속에 갇힌 우리의 마음을 마구 유혹합니다.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낮꿈의 특성으로서 네 가지의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낮꿈은 갈망이라는 능동적 의지에 의해서 야기된다. 둘째, 낮꿈 속에는 자아가 분명하게 현존하고 있다. 셋째 낮꿈은 우리의 일상 삶이 더 낫게 되기를 바란다. 넷째, 낮꿈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미래 사회의 설계를 완성시키도록 작용한다. - 역주)

 

모든 사람들의 꿈은 이를테면 대중 잡지에 실린 제반 이야기들과 관련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일확천금을 얻게 되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 해피엔드로 끝나는 허황된 이야기 등이 바로 낮꿈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낮꿈은 “울타리 밖에서 구경하는 자에 의해서 à la Zaungast” 조종당하거나” 진정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고유의 영역에 머물면서 그를 자극합니다. (울타리 밖에서 구경하는 자”는 낮꿈을 접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는 낮꿈을 직접 꾸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낮꿈의 유형으로서의 가상적 공간을 구경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서커스를 구경하는 소년처럼 수동적으로 낮꿈을 접하며, 우리의 욕망을 심리적으로 승화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낮꿈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욕망을 실현시키도록 추동한다. - 역주)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행복에 관한 것으로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다고나 할까요. 인간의 행복에 관한 꿈은 가장 오래된 공상적 이야기인 동화 속에 실려 있습니다. 용감한 재단사 소년은 가난한 자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기지를 발휘함으로써 거인을 무찌르고 아름다운 공주를 만나게 됩니다.

 

기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놀고먹는 세상 Schlaraffenland”에 관한 동화는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극한적인, 노동하지 않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산들은 온통 치즈로 덮여 있으며, 포도나무에는 소시지 덩어리들이 매달려 있고, 개울에는 가장 훌륭한 사향 포도주가 흐르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포착된 사회 유토피아도 이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유와 꿀이 강물처럼 흐르는 땅은 콜럼버스가 서양에서 믿었던 지상의 천국이었습니다. 콜럼버스가 갈구한 유토피아는 실제로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결과를 가져다준 바 있습니다. (잘 알려진 바 있듯이 콜럼버스는 동방의 인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의 믿음은 결국 신대륙을 발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의 갈망은 이렇듯 사회 변화의 초석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의 지리학적 유토피아의 장에 서술되어 있다. - 역주)

 

(뒤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