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모제스 로젠크란츠, 혹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쓰기 (3)

필자 (匹子) 2021. 10. 21. 11:40

7.

얼마 지나지 않아 파울 첼란은 심리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표절 시비 때문이었다. 가령 이반 골 (Ivan Goll, 1891 - 1950)의 아내, 클레어 골은 첼란이 1953년에 간행된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서 죽은 남편의 시구를 마구 베꼈다고 주장하였다. 시적 표현들은 우연히 비슷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다른 작품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작품을 쓸 수도 있다. 굳이 잘못 아닌 잘못을 찾는다면 그것은 체험현실이 동일하다는 데에서 발견되는 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전후 독일 문학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시, 귄터 아이히 (Günter Eich, 1907 - 1972)의 「소지품 목록」이 체코의 시인 리하르트 바이너 (R. Weiner, 1884 - 1937)의 「장 밥티스트 샤르댕」의 모방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바이너는 프랑스의 경건한 정적주의자이며 화가인 장 밥티스트 샤르댕 (Jean Baptist Chardin, 1699 - 1779)의 간소한 삶에 관한 시를 쓴 적이 있는데, 시의 구조가 아이히의 시의 그것과 무척 흡사했던 것이다. 이때 아이히는 시를 쓸 무렵 바이너의 작품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항변하였다. 이로써 아이히의 표절 시비는 순간적으로 잠잠해 진다.

 

그러나 파울 첼란을 둘러싼 표절 시비는 아이히의 경우와는 달리 비교적 오래 지속된다. 이는 어쩌면 유대인들을 내심 증오하는 독일인들의 간접적인 태도 때문일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유대인 문제를 하나의 흥미진진한 가십거리로 만들어내려는 독일 언론의 교활한 농간 때문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첼란을 둘러싼 표절 시비는 나중에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이 와중에 심리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은 첼란 자신이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1970년 임마누엘 바이스글라스의 시, 「그는」이 발표되었을 때, 첼란의 상처에서 다시 어떤 고름이 터지기 시작한다. 「그는」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중에다 무덤을 올리고 아내와

자식과 함께 정해진 장소로 이주한다.

우리는 열심히 삽질하고 다른 사람은 연주한다,

사람들은 무덤 하나 만들고 춤을 계속 춘다.

 

그는 내장 위에서 격렬하게, 마치 자신의

얼굴처럼 근엄하게 시위 당기기를 원하고 있다,

조용히 죽음에 관해 연주해, 죽음은 독일의

장인이야, 온 나라에 안개로 퍼져나가는

 

저녁 무렵에 황혼의 피가 끓어오르면

기진맥진한 나는 쓰라린 입을 열어젖힌다.

관처럼 넓고, 죽음의 시간처럼 협소한

만인을 위한 집 무덤을 공중에 묻으면서.

 

그는 집에서 뱀들과 유희한다, 위협하고 글 쓴다,

독일에서 그레첸의 머리칼처럼 환하게 밝아온다.

구름 속의 무덤은 비좁게 만들어진 않았다,

저 멀리 죽음은 독일의 장인이었으니까.

 

(Wir heben Gräber in die Luft und siedeln/ Mit Weib und Kind an dem gebotnen Ort./ Wir schaufeln fleißig, und die andern fiedeln,/ Man schafft ein Grab und fährt im Tanzen fort. //

 

ER will, daß über diese Därme dreister/ Der Bogen strenge wie sein Antlitz streicht:/ Spielt sanft vom Tod, er ist ein deutscher Meister,/ Der durch die Lande als ein Nebel schleicht. //

 

Und wenn die Dämmerung blutig quillt am Abend,/ Öffn’ ich nachzehrend den verbissnen Mund,/ Ein Haus für alle in die Lüfte grabend:/ Breit wie der Sarg, schmal wie die Todesstund. //

 

ER spielt im Haus mit Schlangen, dräut und dichtet,/ In Deutschland dämmert es wie Gretchens Haar./ Das Grab in Wolken wird nicht eng gerichtet:/ Da weit der Tod ein deutscher Meister war.)

 

상기한 시를「죽음의 푸가」 그리고「통곡」과 비교해 보라. 그러면 우리는 첼란의 시가 분명히 표절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작품에서 나오는 표현들이 우연히 유사하다고 말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절들이 너무나 많다. “죽음은 독일의 장인”, “그는 집에서 뱀들과 유희한다”, “구름속의 무덤은 비좁지 않다” 그리고 “그레첸의 머리칼” 등은 어째서 거의 동일할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첼란은 바이스글라스의 미발표 작품을 놀라울 정도로 “탁월하게” 훔쳤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표절 작품이 순수한 창작보다도 나은 경우가 세상에는 종종 발생한다. 가령 대학생들의 베낀 리포트가 빌려준 리포트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곤 하지 않는가? 첼란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8.

그럼에도 첼란의 작품은 문학사에 남을 명작이다. 이에 비하면 바이스글라스의 작품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형식에 구애받은 느낌을 풍기지 않는가? 「죽음의 푸가」는 프랑스 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유연하게 울려 퍼진다. 이에 반해 바이스글라스의 시의 문체는 투박하고 경직된 느낌을 드러내고 있다. 흔히 시인들이 말하는 시적 이미지의 세련되고도 유연한 특성은 바이스글라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이에 대한 이유를 무엇보다도 주어진 문학적 풍토에서 추론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바이스글라스는 첼란과는 반대로 오직 루마니아 지역에만 살았다. 그렇기에 그는 프랑스 모더니즘 내지 전위주의의 양식 등을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바이스글라스의 독일어는 고립된 것이었다. “루마니아 독일어”는 폐쇄적이고 주위의 다른 언어 (슬라브어, 헝가리어 그리고 유대 독일어 등)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었다. 바이스글라스는 서너 개의 외국어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자라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루마니아 독일어의 문체는 본토 독일어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점을 띄고 있었다. 이는 어쩌면 로젠크란츠의 시에도 부분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가령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1883 - 1924)의 독일어가 독자에게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이유도 체코 독일어의 지역성 때문이 아닌가?

 

설령 첼란이 친구의 시구를 표절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죽음의 푸가」는 오점 묻은 금덩어리로 남을 것이다.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1887 - 1972)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생각해 보라. 구약성서의 구절 가운데 많은 부분이 수없이 가필 수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은 성서 자체의 위대성을 훼손하는 것인가? 오히려 가필과 수정이 있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성서 속에 담긴 혁명적 메시아사상과 이를 거부하는 자들의 자기 검열을 더욱더 분명하게 인지하는 게 아닐까?

 

중요한 것은 동일한 체험 그리고 이에 대한 진지한 문학적 성찰을 담은 기록이지, 치졸한 의도에서 비롯한 표절 시비는 아닐 것이다. 몇 개의 시구의 유사성만 가지고, 시인 한 사람을 정신적 도둑으로 매도하는 게 과연 공명정대한 일일까? 어쩌면 첼란의 시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더욱더 바이스글라스와 로젠크란츠의 잊혀진 문학을 기억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사자인 첼란은 표절 문제로 인하여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이미 언급했듯이 바이스글라스는 첼란과 함께 같은 인문계 김나지움을 다녔다. 1941년 독일 군이 루마니아를 침공했을 때 두 사람은 체포되어, 강제노동의 현장으로 함께 끌려갔다. 추측컨대 첼란은 바로 이 시기에 친구의 암송하는 시구를 우연히 엿들었는지도 모른다. 바이스글라스의 시를 대하면서 첼란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옛 문우의 명성을 가로챘다는 생각이 그에게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과 고통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결국 첼란은 그해 4월에 파리의 쎄느강에서 투신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아내도 자식도 없이 서재와 몇 권의 시집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고인의 집에서는 한 통의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인의 서가에서 바이스글라스의 시집을 발견하였다. 친구의 작품에 대한 표절이 자살의 결정적 이유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첼란은 죽었지만 남은 두 친구는 그를 한번도 비난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로젠크란츠의 시 「그대는 얼마나 귀중한가 (Wie mußt du kostbar sein)」를 인용하려 한다. “사악한 보석”으로서의 죽음은 첼란의 삶과 직결되는 시구는 아니지만, 그게 어째서 첼란의 삶과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일까?.

 

그대는 얼마나 귀중한가,

사악한 보석, 죽음이여

너를 보상하려고

사람들은 모든

삶을 달려가야 하니

너를 획득하려고

죽어야 하지,

그래 죽어야

 

(Wie mußt du kostbar sein/ Tod böser Edelstein/ daß man/ dich zu erkaufen/ muß durch sein ganzes Leben laufen/ daß man/ dich zu erwerben/ muß sterben/ ja sterb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