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88

서로박: (1) 사드의 "새로운 저스틴"

1. 방대한 철학적 모험 소설: 친애하는 S, 오늘은 섬뜩한 느낌을 풍기지만, 강렬한 성적 욕구를 전해주는, 소설 한 편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소설의 원제목은 『새로운 저스틴 혹은 미덕의 불행, 그미의 여동생 줄리엣의 이야기 La Nouvelle Justin ou les Malheurs de la l’historie de Julientte, sa sœur』 (1797)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은 노골적인 성 묘사, 거침없는 사회 비판 등으로 당시에 작자 미상으로 간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다름 아니라 프랑스의 관료주의자, 철학자, 혁명적 정치가 마르키 드 사드 (1740 – 1814)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를 사드 백작이라고 칭하는데, 원래의 이름은 도나텡 알폰스 프랑스와 마르키 드 사드입..

32 근대불문헌 2023.04.19

서로박: 페늘롱의 베티카, 살렌트 (3)

(앞에서 계속됩니다.) 17. 경제 정책을 위한 두 가지 전제 조건 그리고 학문과 기술에 대한 페늘롱의 견해: 베티카의 경제는 공동 재산에 토대를 두는 반면에, 살렌트에서는 사적 재산을 용인합니다. 그렇지만 베티카와 살렌트는 기본적 토대에 있어서 그다지 이질적이지는 않습니다. 두 개의 공동체 공히 경제적 이익 추구에 대해 제동을 가하고 있을 뿐, 국가는 개개인들의 최대한의 공동 재산을 사용하도록 조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페늘롱은 경제 정책의 두 가지 핵심적인 조건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노동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사치품의 생산과 소비를 철저히 금지시킨다는 점입니다. 경제 정책의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통해서 베티카와 살렌트는 탄탄한 경제적 토대를 지니게 되며, 오로지 ..

32 근대불문헌 2023.04.06

서로박: 페늘롱의 베티카, 살렌트 (2)

(앞에서 계속됩니다.) 8. 현실적 위기는 법을 무시하는 독재자의 인위적인 정책에서 비롯한다.: 페늘롱은 고대의 유토피아 작가와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삶의 이상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이상의 범례는 일견 초시대적인 범례로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주어진 사회정치적 현실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페늘롱이 처했던 당시 현실적 위기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원인은 개별 군주들이 주어진 법에 따라 정책을 펼치는 게 아니라,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통치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두 번째 원인은 인간의 도덕적 양심적 잣대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사치스러운 사고를 가리킵니다. 페늘롱은 첫 번째 원인과 관련하여 고전적 의미에서의 폭군의 개념을..

32 근대불문헌 2023.04.06

서로박: 페늘롱의 베티카, 살렌트 (1)

1. 페늘롱의 소설: 미리 말하지만 페늘롱의 소설 『텔레마크의 모험』속에는 두 개의 유토피아 모델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베티카”라는 공동체 모델이며, 다른 하나는 “살렌트”라는 국가 모델입니다. 이것들은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하며, 동시에 유토피아 역사에서 생략될 수 있는 부분을 제각기 보충해주고 있습니다. 페늘롱의 작품은 오늘날 18세기 초의 프랑스 문학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페늘롱의 작품이 발표될 무렵 이를 예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부르군드 공작이자 루이 14세라고 불린 황제의 큰아들의 교육을 위해 구상되고 발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바람직한 제후가 되려면 어떠한 덕목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소설 속에 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한마디로 ..

32 근대불문헌 2023.04.06

서로박: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질곡"

19세기 후반부의 유럽 사회는 –나라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수직 구도의 가부장적 사회였다. 일부일처의 결혼제도는 기독교 윤리와 접목되어, 유일무이하게 정당한 삶으로 인정받았다. “가족 family”은 주지하다시피 어원상 “농부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가부장은 국가가 명하는 강령을 하달하는 존재로서 마치 군대의 상사의 역할을 담당한다. 시민 사회의 관습과 성 윤리는 오로지 “금기Tabu”만을 만들어내었다. 강제적 성 윤리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특히 이혼한 여성들이었다. 남성들은 홍등가에서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의 기혼녀들은 마치 가축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 여성들이 결혼 외의 다른 방법으로 행복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

32 근대불문헌 2023.02.24

서로박: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방랑 여인"

19세기 유럽에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가 횡행하고 있었다. 당시 사회는 글 쓰는 여성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여성들에게는 작품을 발표하는 기회조차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여성이 집에서 살림만 살 것이지, 무슨 대단한 영화를 누리려고 작가로 활동하려고 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이었다. 그렇기에 여성 작가 지망생들은 남자들에 의해서 철저히 짓밟히고, 기만당하며, 버림받기 일쑤였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Sidoni-Gabrielle Colette, 1873 – 1954)의 삶 역시 이러한 비극을 피해갈 수 없었다. 콜레트는 1873년 프랑스의 부르고뉴에서 퇴직 장교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되어, 그미는 세 언니와는 달리 정규 교육을 받..

32 근대불문헌 2023.02.21

서로박: 라옹탕의 고결한 야생 (5)

(앞에서 계속됩니다.) 23. 새로운 인간으로서 새롭게 견지해야 할 덕목, 선한 마음, 우정 사랑 그리고 고유한 자기 결정권: 라옹탕은 국가의 우생학적인 요청 내지 부모의 외부적 강요에 의한 혼인을 거부하고, 오로지 상호 애정 내지 신뢰감에 근거한 혼인을 용납하고 있습니다. 선한 마음, 우정, 사랑 그리고 인간의 고유한 자기 결정권이야 말로 새롭게 태어난 인간이 견지해야 할 훌륭한 덕목들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하면 질투심, 만용, 오만함 그리고 시기심 등의 감정은 인간을 슬프게 살아가게 하고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가령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의 열정의 노예 내지는 왕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왕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왕을 위해서 부역과 전쟁을 치르는 노예가 바로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입..

32 근대불문헌 2022.12.17

서로박: 라옹탕의 고결한 야생 (4)

(앞에서 계속됩니다.) 16. 자연에 의거한 아나키즘의 야생 공동체: 상기한 사항에 비하면 라옹탕은 이러한 제반 정책이 자연 상태에 위배된다고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그는 국가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 사회 내지 문명이 형성되기 이전의 상태를 투시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야생의 공동체가 하나의 유토피아의 상으로 투영되고 있습니다. “야생의 공동체는 국가주의의 유토피아와는 반대로 자연에 대한 지배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도시 문화라든가, 국가 내지 인위적 대칭의 모든 경향 또한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 고결한 야생의 유토피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선한 인간성을 지니며,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고 굳게 믿고 있다.” (Funke: 25). 이와 관련하여 라옹탕이 휴런 부족의 사람들을 “벌거벗은 철학자philoso..

32 근대불문헌 2022.12.17

서로박: 라옹탕의 고결한 야생 (3)

(앞에서 계속됩니다.) 10. 자유로운 인디언으로 살려는가, 아니면 프랑스 노예로 살려는가?:상기한 토론을 통해서 라옹탕은 유럽 사회가 어떻게 잘못 발전해 왔는가를 은근히 지적합니다. 아다리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충고를 받아들여, 휴런 사람이 되게. 우리가 처한 현실적 정황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이제 모조리 알 것 같네. 내 육체의 주인은 바로 나야. 그래서 나는 마음에 드는 것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네. 나라는 존재는 내 민족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람이야.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아. 내가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정신일 뿐이야. 이에 비해 자네는 육체와 정신을 그대의 왕에게 송두리째 바치고 있네. 그대의 부왕은 그대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

32 근대불문헌 2022.12.17

서로박: 라옹탕의 고결한 야생 (2)

(앞에서 계속됩니다.) 6. 라옹탕의 삶 (4):1690년 그리고 1692년에 라옹탕은 루이 드 부아드Louis de Buade의 특별 사절단으로 프랑스로 여행합니다. 이때 그는 가문의 유산을 돌려받기 위하여 당국에 청원서를 제출합니다. 그밖에 라옹탕은 왕궁을 직접 방문하여, 식민지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 군사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의 두 가지 시도는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물론 라옹탕은 1692년 중위로 승진하여, 영국군으로부터 뉴펀들랜드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의 안전을 돌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배속된 상관과 여러 번 마찰을 겪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그는 1693년 12월에 당국으로부터 허가도 받지 않은 채 프랑스로 되..

32 근대불문헌 2022.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