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페늘롱의 베티카, 살렌트 (3)

필자 (匹子) 2023. 4. 6. 09:04

    

(앞에서 계속됩니다.)

 

17. 경제 정책을 위한 두 가지 전제 조건 그리고 학문과 기술에 대한 페늘롱의 견해: 베티카의 경제는 공동 재산에 토대를 두는 반면에, 살렌트에서는 사적 재산을 용인합니다. 그렇지만 베티카와 살렌트는 기본적 토대에 있어서 그다지 이질적이지는 않습니다. 두 개의 공동체 공히 경제적 이익 추구에 대해 제동을 가하고 있을 뿐, 국가는 개개인들의 최대한의 공동 재산을 사용하도록 조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페늘롱은 경제 정책의 두 가지 핵심적인 조건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노동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사치품의 생산과 소비를 철저히 금지시킨다는 점입니다. 경제 정책의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통해서 베티카와 살렌트는 탄탄한 경제적 토대를 지니게 되며, 오로지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생활 방식을 정착하게 됩니다. 학문과 기술에 대한 페늘롱의 입장은 다소 모호한 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살렌트에서는 예술과 학문이 가장 고귀한 교육의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영역들은 국가의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학문과 예술은 개혁을 위한 살렌트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고 페늘롱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베티카 공동체는 학문과 예술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스, 이집트 그리고 그밖의 문명화된 나라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학문 그리고 예술은 페늘롱에 의하면 허영심을 부추기고, 사치스러운 생활방식을 조장하게 하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18. 정치제도, 베티카와 살렌트의 가족 제도: 베티카 사람들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며, 이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사고는 가부장주의에서 출발합니다. 페늘롱은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부부는 모든 집안의 문제를 함께 해결한다. 남자는 일에 몰두하고, 여자의 일은 가정에 국한되어 있다. 여자는 남자를 돕고, 남자의 신뢰를 얻어야 하며, 아름다움이 아니라, 선한 마음으로 남자를 사로잡아야 한다.” (Fénelon: 155). 일부일처제는 살렌트에서도 그대로 채택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함께 살면, 국가에 내는 세금 또한 적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으면, 그 가족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베티카와 살렌트의 정치 구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티카에서는 상급 체제로서의 국가 조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모든 가족 속에 가장이 존재하며, 가장이 바로 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갈등은 가족 내에서 해결되기 때문에 굳이 국가라는 상부 조직이 불필요한 것입니다. 사회적 적대 행위가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은 농경 내지 유목 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부라든가 분에 넘치는 향락 자체가 처음부터 온존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서 살렌트에서는 국가의 조직이 존재합니다. 국가의 관리들은 한편으로는 상인들의 사업을 관리 감독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 인간과 가족의 도덕적 태도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살렌트의 국가는 개별 인간들이 결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해 규칙을 정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19.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질적인 관계: 페늘롱은 작품에서 계속 다음의 사항을 반복합니다. 즉 권력을 지닌 자는 어떻게 해서든 인민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권력자는 마치 가축 떼를 위한 목자 내지는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Fénelon: 438) 이 점에서 페늘롱의 정치적 입장은 17세기에 나타난 존 로크라든가 홉스의 사회 계약론과는 근본적으로 차이점을 지닙니다. 로크와 홉스의 견해는 개인의 존재, 개인의 고유한 자유에서 출발하지만, 페늘롱의 이상적인 국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페늘롱이 생각하는 이상 국가는 개별화된 인간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지배자와 인민 사이의 동질성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레트만 염두에 둔다면, 인민과 지배자의 관계를 무조건 가축 떼를 위한 목자 내지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의 관계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페늘롱이 염두에 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동질적인 일원성의 관계는 베티카의 공동체에서는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20. 살렌트 국가 내의 빈부차이 그리고 계층 차이의 극복: 상기한 내용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페늘롱의 유토피아를 제각기 달리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부장적 가정 구조 내에서는 어떠한 등급의 질서가 자리하지 않으며, 개별적 인간 사이의 차이점이 자리하지 않습니다. 베티카 사람들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살렌트의 사회적 관계는 이와는 다릅니다. 물론 살렌트에서는 개별적으로 다른 일을 행하는 인간들이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7세기 말 유럽 사회의 일곱 개로 분화된 계층적 구도를 염두에 둘 때, 살렌트 국가는 당시의 주어진 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를테면 왕궁 내지 도성 내부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상은 외곽에서 비참하게 연명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살렌트 유토피아에서는 완전히 파기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도시와 시골 사이의 경제적 불균형은 사전에 차단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살렌트 국가는 다양한 계층 하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민에게 사치와 향락을 철저히 금지함으로써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계층적 차이를 파기시키고 있습니다. 살렌트 국가는 부자들로 하여금 부동산으로 부정 축재하지 않도록 조처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농토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빈부의 차이는 서서히 극복되어 나갑니다. 첫 번째 귀족 계층을 제외하면, 살렌트 국가에서는 오로지 공공의 안녕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만이 더 높은 신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21. 베티카와 살렌트의 교육, 예술 그리고 종교: 그렇다면 페늘롱은 베티카와 살렌트의 교육, 종교, 예술 등의 영역을 어떻게 규정할까요? 베티카의 경우 모든 인위적 제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영역은 자세히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살렌트의 경우 제도와 체제 등이 이상 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렌트의 아이들은 공립학교에서 신에 대한 경외감, 조국애, 준법정신 등을 하나씩 차례대로 배워나갑니다. 살렌트에서 최상의 교육 이념으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명예를 중시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명예는 삶 내지 삶의 향유보다도 더욱 중요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육체를 강건하게 만들고 민첩성을 키우기 위해서 체육시간에 레슬링, 전차 달리기를 연마합니다. 미술 교육을 받는 피교육자는 몇몇 엘리트 그룹으로 제한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황홀감에 빠지게 하고 음욕을 부추기는음악 과목을 포기하는 대신에 도덕 과목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22. 종교에 관한 사항: 교육의 영역에 비하면 종교는 페늘롱의 유토피아에서는 부차적으로 기능할 뿐입니다. 종요적 예식에 관한 한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그것을 추종합니다. 종교의 질문 가운데에 최상의 권위를 차지하는 자는 멘토로서의 아테네 여신입니다. 그렇지만 아테네는 다른 신들과 달리 매우 이성적인 힘을 드러내는 여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티카 사람들은 순수한 자연 속에서 미덕의 본질을 찾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페늘롱의 종교적 관용사상입니다. 즉 무신론자 역시도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이라는 사상 말입니다. 한 가지 언급해야 할 사항은 살렌트 지역의 개혁이 종교의 제도적 토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페늘롱은 텔레마크의 모험에서 신지학의 차원에서 언급되는 이성의 종교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후는 페늘롱의 견해에 의하면 어떠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종교 내적인 갈등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종교적 갈등이 제기될 경우에 권력자는 종교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중재할 게 아니라, 법정이 이 문제를 다루어 올바른 판결을 내리도록 유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3. 법정의 기능: 그렇다면 법정은 두 개의 공동체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을까요? 베티카는 국가라는 체제 자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법적인 문제는 가정 내에서 가장에 의해서 처리됩니다. 가장은 자신의 자식 내지 손자들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그들을 처벌할 권한을 지닙니다. 물론 처벌을 내리기 전에 그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문의하곤 합니다. 베티카에서 누군가를 처벌하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베티카의 경우에 비해서 살렌트의 법정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전문가로 이루어진 판관들입니다. 물론 제후는 법의 시행에 관한 일반적인 법칙들이라든가 법의 유건해석에 관한 기본적 틀을 제시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재판관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하는 사적인 갈등에 대해 시시콜콜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국가는 도저히 범법 행위에 대한 예방 조처에도 불구하고 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할 경우 이에 관한 근본 문제를 따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며, 잠재적 범죄자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위협을 가해야 한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한해서 발생할 뿐입니다.

 

24. 이웃 국가와의 전쟁에 관한 문제: 베티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조건 정복 전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무기를 거머쥡니다. 물론 무기를 거머쥐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이웃 국가 역시 지금까지 베티카로부터 공격을 당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또한 베티카 사람들은 이웃 나라를 침공하여 인접 국가의 주민들을 노예로 만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살렌트의 경우도 베티카의 경우와 거의 동일합니다. 주민들은 정복 전쟁에 반대하지만, 조국이 다른 나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 무기를 거머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살렌트 주민들은 전쟁 자체를 혐오합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승리한 국가에게 약간의 전리품과 노예들을 제공하지만, 패배한 국가에게 엄청난 상처와 몰락의 위험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렌트 사람들은 청년들로 하여금 군사 훈련에 몰두하게 하며, 군사 훈련에 대해 매우 중요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또한 군사 전문가 내지 군인 조련사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따라서 살렌트 사람들은 전쟁을 멀리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기 사용 그리고 진법을 배우는 군사 훈련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25. 유럽인과 베티카인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 그렇다면 페늘롱이 설계한 서로 다른 두 개의 유토피아 공동체, 베티카와 살렌트가 고대의 유토피아 모델의 원형을 답습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페늘롱의 두 개의 이질적인 유토피아의 상을 제각기 별개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티카 공동체의 경우 모든 제도적 강제 기구를 처음부터 철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는 푸아니의 오스트레일리아 공동체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푸아니의 경우 국가의 존재만 없을 뿐, 도시와 지방의 제반 시설들이 철저한 기하학적 모델에 의해서 축조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베티카의 경우 유럽 문명의 모든 제도적 장치가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습니다. 베티카 사람들은 집 없이 황무지에서 살아가는 유목 집단입니다. 그렇기에 혹자는 베티카 공동체를 브라질과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인디언들의 삶과 비교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베티카는 오로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생활하는 집단입니다. 그렇기에 유럽인들의 삶과 베티카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극명하게 다릅니다.

 

26. 유럽인과 살렌트인과의 공통점: 베티카에 비하면 살렌트의 삶은 유럽인들의 삶과 어느 정도 공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의 유토피아 전통은 인류가 어떻게 높은 단계의 문명으로 발전되었는가를 분명히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페늘롱은 완전한 공동체를 하나의 실현 가능한 구상으로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즉 살렌트는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형편없는 공동체였지만, 나중에 이르러 고도로 발전된 경쟁력 있는 국가 공동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페늘롱은 작품 속에 멘토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멘토어는 제자 텔레마크로 하여금 살렌트의 이상적인 사회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게 합니다. 이로써 텔레마크는 살렌트가 얼마든지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네는 살렌트의 모든 훌륭한 제도적 장치에 대해 그렇게 감동을 받고 있어. 그런데 이 모든 제도적 장치는 이타카에서 실제로 행해져야 하는 과업에 대한 그림자의 상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게. 자네의 인품과 덕망으로써 높은 사명감을 성취하려고 마음먹는다면 말일세.” (Fénelon: 408). 여기서 언급되는 그림자의 상은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27. 살렌트는 플라톤의 국가처럼 하나의 규범적인 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요약하건대 살렌트라는 모범적인 상은 최상의 국가의 규범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규범 자체는 플라톤의 국가의 이상적 상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적이며 모든 공동체, 심지어 프랑스의 앙시앵레짐에도 적용될 수 있는 무엇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멘토어가 제시하는 어떤 교육적 목표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멘토어의 제자, 텔레마크는 철학적 가르침과 경험 등을 통해서 서서히 성숙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페늘롱은 자신이 처해 있는, 하자를 지닌 사회적 현실이 변화되기를 무엇보다도 기대하였습니다. 오로지 사회 구조를 바람직한 방식으로 변화시키려는 혜안만이 궁극적으로 천한 사람들의 법 없는 무정부적 상태를 개선하고, 상류층의 폭압적 정책을 차단시킬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까지 페늘롱은 18세기 유토피아 연구에서 중요한 사항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페늘롱이 설계한 두 가지 방식의 사회 유토피아는 어떤 특정한 유토피아 설계가 생략할 수 있는 수많은 부분들을 서로 보완해주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 라 보에티, 에티엔 드: 자발적 복종, 박설호 역, 울력 2004.

- 페늘롱, 프랑스와: 멘토의 탄생, 강미란 역, 푸르메 2012.

- Fénelon, François de La Mothe: Die Abenteuer des Telemach (독어판) Stuttgart 1984.

- Saage, Richard: Utopische Profile, Bd. 2, Münster 2002.

- Servier, Jean: Der Traum von der großen Harmonie, Eine Geschichte der Utopie, München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