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질곡"

필자 (匹子) 2023. 2. 24. 10:06

19세기 후반부의 유럽 사회는 –나라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수직 구도의 가부장적 사회였다. 일부일처의 결혼제도는 기독교 윤리와 접목되어, 유일무이하게 정당한 삶으로 인정받았다. “가족 family”은 주지하다시피 어원상 “농부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가부장은 국가가 명하는 강령을 하달하는 존재로서 마치 군대의 상사의 역할을 담당한다. 시민 사회의 관습과 성 윤리는 오로지 “금기Tabu”만을 만들어내었다.

 

강제적 성 윤리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특히 이혼한 여성들이었다. 남성들은 홍등가에서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의 기혼녀들은 마치 가축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 여성들이 결혼 외의 다른 방법으로 행복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어떠한 남자를 만나는가? 에 따라 결혼생활은 천차만별로 이어질 수 있었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는 이러한 사실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장편 소설의 제목, 『질곡L’entrave』(1913)은 가부장 사회에서의 결혼이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탐색으로 이해될 수 있다.

 

주인공은 이전에 발표한 작품 『방랑 여인』에 등장하던 인물인 “르네 네레”다. 그미는 버라이어티 쇼장의 무대에서 직접 연기하는 배우로 활약하는데, 모든 이야기는 르네의 관점에서 일인칭으로 서술되고 있다. 르네는 여름날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친구들과 휴가를 보내는 중이다. 세 명의 친구가 주인공과 함께 지낸다. 그들은 함께 무대에서 일하는 여배우인 메이(May), 메이의 애인인 열정적인 장(Jean),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신중하고 기이한 청년 마소(Masseau)다. 르네는 따뜻한 여름날 즐겁고 사교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의 허전함을 도저히 떨칠 수 없다. 일순간의 외로움 때문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연인과의 이별로 인하여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난 것 같다. 간간이 자신을 찾아오는 불안으로 인해서 자신이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안식처는 세상에 없다고 자책한다.

 

 

산책 도중에 르네는 우연히 언젠가 사랑했던 남자와 마주친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피한다. 남자의 곁에는 부르주아의 삶에 잘 적응한 것 같은 자그마한 여인이 있다. 두 사람 곁에는 아이가 칭얼거리면서 걷고 있다. 르네는 남자를 외면하지만, 다소니와 함께 지내던 열정적이고 황홀한 시간을 잠시 떠올린다. 함께 동거하며 지냈던 나날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주인공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장은 친구인 메이와 서로 애무하는 등 상대방을 애호하지만, 자주 토닥거리고 싸운다. 두 사람은 노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등을 돌리곤 한다. 어느 날 르네는 메이와 장이 더 이상 연인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메이와 장은 끝내  헤어지고 만다. 르네가 중재에 나서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하지만, 이는 허사로 돌아간다. 이 와중에서 장은 머뭇거리다가 르네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사실인즉 자신은 메이와 사귀었지만, 내심 르네를 깊이 연모한다는 것이었다.

 

르네는 일순간 부담스러움을 느낀다. 르네는 친구들의 애정 관계에 얽히고 싶지 않아서 일단 스위스의 제네바로 도피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명의 남자, 즉 장과 마소가 르네의 뒤를 따라온 게 아닌가?. 세 명의 젊은이는 로잔에서 자연스럽게 며칠을 함께 보낸다. 마소는 영문을 모르고 르네에게 메이와 화해하라고 종용한다. 장은 주인공에게 연속적으로 은근한 “플러팅”을 시도한다. 르네는 장의 구애를 처음에는 뿌리치다가, 더 이상 거부하는 게 의미 없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르네와 장은 마소를 따돌리고 파리로 향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면서 몇 달 마치 꿈을 꾸듯이 사랑의 기쁨을 만끽하며 지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의 본색이 드러난다. 장은 르네에 애인으로서의 어떤 조건 없는 헌신만을 요구한다. 그것은 가부장주의의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행해야 하는 무조건적인 복종과 같은 것이었다. 르네로서는 장을 위해서 자신의 독립적인 태도를 꺾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장은 르네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을 때 무척 실망한다.

 

르네는 장을 사랑하지만, 그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다. 그와 결혼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이 출구 없는 구덩이 속으로 잠입하는 일과 유사하게 보인다. 장의 태도는 권위적인 가부장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남자에 대한 여성의 무조건적 복종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요청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던질 수도 없다. 장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면, 장은 언젠가는 자신을 저버리고, 다른 여성에게 추파를 던질 것이다. 르네는 행여나 자신이 장과 헤어질까 전전긍긍한다. 자신을 포기하고 장이 원하는 대로 헌신적으로 살아가기는 너무나 싫다. 그렇다고 그와 헤어진다는 것은 상처 입은 가슴이 더욱 아파올 것 같다. 작가 콜레트는 한 여성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을 “자유에 대한 환상이냐, 동방 여성들의 의존이냐?”라는 갈등의 물음으로 표현한다.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 장과 르네는 잠정적으로 헤어져 있기로 합의한다.

 

 

 

 

두 사람의 서먹서먹한 관계에 끼어든 사람은 이번에는 마소였다. 마소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게 한 장본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두 사람의 애정 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었다. 르네는 마소와의 대화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만약 “여성으로서의 품위dignité la femme”를 포기하고 이와 결부된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깡그리 포기한다면, 자신은 오로지 이 경우에 한해서 사랑하는 남자와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결론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르네와 장은 다시 만나서 서로의 애정을 재확인하려고 한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포옹하는 순간 르네는 자신의 영혼을 그에게 선물로 건네주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이 대목에서 소설은 종결되는데,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실제로 콜레트는 두 번에 걸쳐 남편의 배신을 체험해야 했다. 1903년 그미는 앙리 고티에-빌라르 (Henry Gauthier-Villars, 1859 – 1931)와 이혼했다. 바람둥이 남편은 콜레트가 집필한 일련의 클로딘 소설들을 윌리라는 자신의 가명으로 발표하여 두둑한 인세를 챙겼다. 상심한 콜레트는 1906년부터 1912년까지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무언극Mimodrama”의 배우로 활동하였다. 콜레트의 무언극 연기는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고, 그미로 인해 단발머리의 헤어스타일이 하나의 유행처럼 퍼지기도 했다. 1907년 콜레트는 나폴레옹 3세의 이복동생의 딸인 마틸데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의 번화가에 있는 댄스홀, 믈랑 루즈에서 열연했다. 이때 두 여인은 마치 레즈비언이라도 되는 듯이 무대에서 진득한 키스를 나누었는데, 경찰이 급습하여 팬터마임 공연은 중단되기도 했다.

 

1912년 콜레트는 프랑스의 일간지 『르마탱Le Matin』의 편집인 앙리 드 쥬브널 (Henry de Jouvenal, 1876 – 1935)과 결혼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남편은 주위 여성들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콜레트는 1923년에 다시 이혼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콜레트에게 오랜 기간 변함없이 사랑한 사람은 미국 출신의 여성 작가, 나탈리 클리포드 바니 (Natalie Clifford Barney, 1876 – 1972)였다. 한때는 르네 비비앙과 레즈비언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바니는 콜레트가 죽을 때까지 성심을 다해 그미에게 사랑과 우정을 베풀었다.

 

사실 사랑과 결혼에는 왕도가 없다. 누구와 사는가에 따라 사랑과 결혼의 여정은 천차만별로 이어질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 유럽의 여성들은 가부장주의의 강제적 성 윤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쩌면 작가는 이러한 관습, 도덕 그리고 법으로 정해진 혼인이라는 인연이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질곡”인가 하고 독자에게 묻고 싶었는지 모른다. 요약하건대 콜레트의 『질곡』은 한 여성이 처해 있는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정교하게 서술하고 있다. 놀라운 심리적 묘사에서 작가의 강점이 잘 드러난다.

 

콜레트는 일부러 짤막하고 간결한 사건 전개를 통해서 애정 내지는 결혼에 관한 무겁기 이를 데 없는 본질적 문제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젊은 여성은 한편으로는 자유와 독립을 갈구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안온하고 포근한 사랑을 갈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고독과 외로움을 견딜 수 없을까 몹시 두려워한다. 콜레트는 여성들의 이러한 복잡하게 얽힌 심리 상태를 예리하게 투시하고 결혼생활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성을 보여주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