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4) 아홉 구름 속의 변주곡, 박미소의 "보리암 시편"

필자 (匹子) 2021. 12. 21. 15:57

: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어째서 허상이 아름답고, 실상이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허상 속에는 갈망, 즉 미래를 촉구하는 희망이 도사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로 정치적 관점에 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 앞에서 박미소 시인은 “그” 그리고 “나”가 살아가는 공간을 적소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좋은 곳에 사는 자는 좋은 삶을 사는 자 bene qui latuit bene vixit”이지요. 이 시구는 오비디우스의 『고독 (Tristia)』에 실려 있습니다. (Y. S. Tsybulnik. Eingängige lateinische Ausdrücke. 2003. S. 113). 시구에는 고통을 감추고 외로운 자신을 위로하려는 흔적이 역력합니다.

너: 세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고 싶은 곳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이유, 정치적 이유 등이 우리의 발목을 잡곤 합니다.

 

: 그렇지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 나조 (Ovid, BC. 43 - AD. 17)는 말년에 흑해 지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시인은 가난, 그리고 정치적 이유에서 유배를 떠나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비디우스 역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미움을 사서 흑해의 오지에서 외롭게 살다가 사망했습니다.

: 오스트리아의 작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Christph Ransmayr는 1988년 『최후의 세계Die letzte Welt』라는 소설에서 오비디우스의 흔적은 찾는 이야기를 다룬 바 있습니다. 계명대 장희권 교수는 소설을 멋지게 번역하여 한국어 판으로 간행한 바 있지요?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최후의 세계, 열린책들, 장희권 역 2004.)

: 아 그랬었지요. 김만중도 말년에 남해에서 고독하게 살다가 유명을 달리했지요? 시인과 예술가는 낯선 곳에서 어쩔 수 없이 거주하는 숙명을 감내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보리암 시편」속에 담겨 있는 세 번째 철학적 측면의 함의는 무엇인가요?

나: 서양의 역사에서 파라켈수스Paracelsus라든가 후페란트Hufeland와 같은 명의들은 환자를 치료한 다음에 간절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소중한 것은 신앙심이 아니라, 환자의 갈망이라고 했습니다. 즉 환자가 완전히 치유되기 위해서는 나아져야 한다는 자신의 내적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러한 믿음은 인간의 몸에 신경 자극 호르몬인 세로토닌, 엔돌핀 등을 팍팍 돌게 하지요?

: 그렇습니다. 언젠가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하나의 천칭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미래의 희망”이라고 적힌 한쪽의 접시는 다른 한쪽의 접시보다 더 무겁다고 합니다. 미래의 희망이 얹힌 접시는 -비록 가볍게 보이더라도- 다른 쪽 접시를 위로 올려 보내도록 작용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성 속에 내재한 유일하고도 정당한 오류라는 것입니다 (Immanuel Kant: Träume eines Geistersehers, in: Kant Werke in zwölf Bänden, Bd. 2. vorkritische Schriften bis 1768, Frankfurt a. M. 1960, S. 952 - 989, Hier S. 961.)

 

: 여기서 우리는 (박미소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김만중의 두 개의 이질적 세계의 문제를 분명히 간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상이 실상보다 휘황찬란한 까닭은 허상 속에 더 나은 삶에 관한 인간의 갈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 정확히 지적해주셨습니다. 희망의 내용은 실재하는 객체가 아니라 어떤 상의 객체로 의식될 때 인간을 더욱더 강하게 추동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물들은 그 자체보다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더욱 고상하게 비친다. (Res nobiliores in mente quam in se ipsis).”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열린책들 2004, 366쪽.) 마음속의 허상이 실상보다도 더 아름답게 비치는 까닭은 인간이 항상 무언가를 더 갈망하고 동경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시(조) 「보리암 시편」은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을 낳게 한다는 점에서 명시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독자들에게 커다란 행운이지요. 부디 바라건대 차제에 박미소 시인이 더욱 정진하여, “21세기의 황진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대 바라는 마음, 또 다른 보폭이지만

해배된 길을 안고 두 눈 뜬 산정에서

가슴에 고여 있었던

응어리를 토해낸다

 

흘러온 시간들이 허공 속을 돌고 있는

한 번도 품지 못한 만경창파 애저녁에

깨춤 춘 나의 모습들

급히 접어 숨기고

 

살아가는 이유를 그대에게 말하고 싶어

간절한 몸짓으로 노을 끝을 움켜잡아

내 안에 숨어서 사는

새를 날려 보낸다

 

참고 문헌

 

- 김만중: 구운몽, 정별설 역, 문학동네 2013

- 란스마이어, 크리스토프: 최후의 세계, 열린책들, 장희권 역 2004.

- 박미소 시집: 『푸른 고서를 읽다』, 들꽃세상 2020.

- 박설호: 새롭게 읽는 독일 현대시, 한신대 출판부 2007.

- 블로흐, 에른스트: 희망의 원리, 열린책들 2004,

- Döpp, Sigma: Werke Ovids. Eine Einführung. dtv, München 1992,

- Kant Werke in zwölf Bänden, Bd. 2. vorkritische Schriften bis 1768, Frankfurt a. M. 1960,

- Tsybulnik, Y. S.:. Eingängige lateinische Ausdrücke.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