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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프리드리히 볼프의 '맘록 교수'

필자 (匹子) 2020. 9. 18. 15:42

 

오늘은 구동독에서 브레히트와 함께 쌍벽을 이루던 극작가 프리드리히 볼프 (Friedrich Wolf, 1888 - 1953) 그리고 그의 극작품, 「맘록 교수 (Professor Mamrock)」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브레히트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지만, 프리드리히 볼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우리나라에서 전무한 실정입니다. 특히 전통적 형식의 연극 이론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그는 브레히트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은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극적 형식이 아닌가요? 따라서 이 자리에서 프리드리히 볼프의 문학을 언급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프리드리히 볼프는 극작가로서 활동한 것 외에도 의사로 활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구동독의 안기부장, 마르쿠스 볼프 (Markus Wolf, 1923 - 2006) 그리고 구동독의 가장 유명한 영화감독, 콘라드 볼프 (Konrad Wolf, 1925 - 1982)의 아버지이지만, 크리스타 볼프와는 아무런 인척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프리드리히 볼프의 흉상 

잠깐 프리드리히 볼프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는 1888년 노이비트에서 유대인 상인 막스 볼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07년부터 1912년까지 그는 하이델베르크, 뮌헨, 튀빙겐, 본 그리고 베를린 대학에서 의학, 철학 그리고 예술사를 전공했습니다. 독일 본 대학은 1914년에 “유아기의 복합 경화증”에 관한 연구로 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뒤이어 볼프는 마이센, 본 그리고 드레스덴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가, 1914년 외항 선원의 주치의로서 캐나다, 그린란드, 미국 등으로 떠나기도 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군의관으로서 처음에는 서부 전선, 나중에는 동부전선에서 일합니다. 그 지역에서 프리드리히 볼프는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이러한 부상은 그로 하여금 평화주의자의 길을 걷게 합니다. 1917년부터 그의 산문 작품이 발표되기 시작합니다. 볼프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총을 잡지 않겠다는 양심선언을 선언한 뒤에 군의관 직을 박차고 나옵니다. 그리하여 볼프는 고향에서 위생 병원 의사로 일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부터 그는 의사로 일하면서, 약초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입니다.

 

볼프는 바이마르 시대에 슈투트가르트에서 “유사치료법 (Homöopathie)” 및 “예방 의학”으로 개업하는 한편, 극작품, 소설, 방송극 시나리오 등을 집필합니다. 1928년에 독일 공산당의 당원이 되어, “무산 혁명 작가 동맹 (BPRS)”의 임원으로 일합니다. 1929년에 발표된 볼프의 극작품 「시안칼리」는 대대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극작가는 경제 대공황의 시기에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어느 여성이 도저히 아기를 낳아서 키울 수 없게 되자, 끝내 시안칼리라는 극약을 복용한다는 내용을 작품에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 때문에 볼프는 잠깐 유치장에 갇히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볼프는 히틀러가 집권하자,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모스크바 등지로 피신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에 볼프는 체포되어 르 베르네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볼프는 1941년 소련의 도움으로 “거짓 여권”을 만들어서, 소련으로 향할 수 있게 됩니다. 전쟁 동안에는 소련에 머물다가, 1945년 이후에 구동독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 이후 프리드리히 볼프는 작가로서 그리고 문화 정책적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1949년에서 1951년 사이에 그는 동독의 대사로서 폴란드 대사관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극작품에 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4막으로 이루어진 극작품, 「맘록 교수」는 1933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1934년 1월 19일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노란 반점. 맘록 박사의 출구”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습니다. 이때 사용된 언어는 “유대 독일어 (Jiddisch)”였다고 합니다. 독일어로서의 초연은 같은 해 11월 8일 취리히에서 성사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볼프는 이미 30년대에 국제적 명성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이 작품의 공연으로 인하여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며, 프랑스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작품은 자전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유대인 출신의 병원장입니다. 그는 휴머니즘을 신봉하지만,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도래하게 되는 파국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러한 한 그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oris Pasternak, 1890 - 1960)의 『의사 지바고(Доктор Живаго)』를 연상시킵니다. 프리드리히 볼프가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탄압을 누구보다도 먼저 예견했다는 사실은 이 작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맘록은 30년대 초에 베를린에서 종합 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자들은 두 파로 나누어집니다. 한쪽 파는 국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 파는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어느 날 시내 한복판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 국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이때 어느 노동자가 총을 맞았고, 병원에 황급히 실려 옵니다. 유대 출신의 직원, 시몬만이 그에게 피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의사와 간호원들 사이에서는 부상당한 아리아인이 유대인의 이른바 더러운 피를 공급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격론이 벌어집니다. 토론은 인종 갈등의 문제로 첨예하게 비화됩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병원장 맘록 밖에 없습니다.

 

1931년 초에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발생합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정부를 장악하였지만, 국회를 장악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국회의 과반수이상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하수인들로 하여금 국회 의사당에 몰래 불을 지르게 한 뒤에, 방화에 대한 책임을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이후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체포됩니다.) 누군가 맘록 교수에게 생존을 위해서 도피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맘록 교수는 이를 일언지하에 무시합니다. 양심적인 의사로서 병원의 환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으며, 자신이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자체 비열한 행위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주인공은 아들, 롤프와 심하게 다툽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저항 운동 그룹에 가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인공의 딸, 루트는 유대인 처녀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납니다. 아들과 딸에게 유대인 탄압에 대한 징후가 감지되었을 때 주인공은 가족과 함께 어디론가 잠적해야 옳았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맘록은 병원에서 열심히 일합니다. 동료 의사인 헬파흐 (Hellpach)는 병원 일 외에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는데, 원장에게 어느 날 몇몇 의사들의 명단을 제시합니다. 이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원장더러 이들을 단칼에 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맘록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중시하는 의사로서 이러한 명령을 절대로 따를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러자 헬파흐는 병원 원장인 맘록의 이름을 유대인 의사의 명단에 기재합니다. 며칠 후 헬파흐는 병원의 원장에게 당국의 다음과 같이 통고합니다. 즉 병원장은 “아리아 인종의 법 규정”에 입각하여, 더 이상 의사로 일할 수 없으며, 대학 병원을 출입할 수 없다는 게 당국의 명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라도 그는 모든 것을 저버리고 어디론가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해야 마땅했습니다.

 

맘록이 병원에서 겪어야 하는 체험은 잉게 루오프의 이야기와 병행하여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잉게 루오프는 병원의 여의사인데, 나치당에 가담한 바 있습니다. 그미는 나치를 수동적으로 동조하지만, 인간적으로 맘록을 흠모하는 의사였습니다. 맘록의 아들이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을 때, 잉게 루오프는 병원의 원장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롤프에 대한 검문검색은 결국 병원장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미는 병원의 차기 원장 직을 놓고, 헬파흐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헬파흐는 병원의 실권을 고려할 때 자신의 경쟁자였습니다. 그렇기에 헬파흐는 그미의 눈에는 정치적으로는 비슷한 태도를 취하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제거되어야 할 제 1순위의 인물로 비쳤습니다. 잉게 루오프의 계략을 알아차린 헬파흐는 결국 그미를 배반자로 몰아서 당국에 고소합니다. 잉게 루호프가 체포되기 직전에, 그미는 맘록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맘록은 잉게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즉 아들 롤프와 함께 도주하여, 국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라고 말입니다. 게슈타포가 맘록을 체포하려고 그를 찾았을 때, 주인공은 이미 목숨을 끊은 지 오래였습니다.

 

맘록 교수는 일견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1885 - 1977)를 연상시킵니다. 블로흐 역시 나치 시대에 체코 프랑스 등지로 망명해야 했습니다. 그는 나치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학 논문 집필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아내인 카롤라 블로흐가 그를 깨워 오늘 당장 프랑스로 망명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하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반드시 오늘 떠나야 해?” 만약 카롤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블로흐는 나치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유대인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을 게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누구든 간에 어떤 일에 골몰하더라도, 절대로 정신을 잃지 말고 주위를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는 교훈 말입니다. 그래, 우리는 인간에게 눈이 두 개 있는 이유가 옆을 살피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밖에 한 가지 지엽적인 사항을 덧붙일까 합니다. 즉 이 작품은 기이하게도 “만하임 교수”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스위스의 취리히에는 실제로 맘록이라는 이름을 지닌 시민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공개적으로 프리드리히 볼프의 극작품 공연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었습니다. 즉 자신의 이름이 유대인 병원장으로 명기되는 게 몹시 싫다는 것이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