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1)

필자 (匹子) 2020. 9. 4. 15:09

“솔로몬이 말하기를 지상에는 새로운 것은 없다. .” (Francis Bacon)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은 -플라톤의 ‘재 기억 (Ανάμνησις)’처럼- 과거 사항에 의존해 있었다. 이제 새로운 지식은 미래 사항에 의해 식별되어야 한다.” (Ernst Bloch)

 

1. 부정적 종말론과 반 유토피아: 인용문은 그 자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재 기억 이론은 전통적 학문 연구의 바탕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과거 지향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 행위는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과거 있었던 원초적 상을 추적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떠한 창조도, 변화된 미래도 용인될 수 없습니다. 모든 새로움은 본질적으로 망각이요, 지식이란 잊힌 것들로부터 떠올린 몇몇 기억의 편린에 불과한 것입니다. 움베르토 에코 역시 이러한 입장과 크게 벗어난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소설, "장미의 이름"의 주제는 한마디로 계몽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물론 소설의 몇몇 부분은 계몽의 중요성을 시사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설적 주제는 전체적으로 볼 때 계몽 내지는 미래의 더 나은 삶에 관한 의지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소설의 저류에 흐르는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유토피아의 정신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부정적 종말의 분위기는 독자로 하여금 “보다 나은 세계를 이룩하려는 생각은 한낱 부질없고 오만한 꿈일지 모른다.”라는 생각을 지니게 합니다. 이는 분명히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 (E. Bloch)가 그의 책 "희망의 원리"에서 주장한 바 있듯이, 예수의 종말론은 한마디로 혁명을 통해 변화된 세상에 대한 신학적 비유나 다름이 없습니다. 에코는 예수의 이러한 종말론을 무엇보다도 인간의 이성 자체에 대한 비판 내지는 역사철학적 진보에 대한 파괴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에코는 핵무기 시대의 두 강대국 사이의 대립을 은밀히 그리고 있습니다. 이로써 나타나는 세기말적 분위기는 에른스트 블로흐가 생각한 “마지막 운명 Eschaton”에 대한 갈망과는 전혀 다릅니다. 무릇 종말론이란 (에코가 말하는) 끝장 내지는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시작입니다. 그렇기에 에코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세기말적인 회의주의는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의 종말론 속에 담긴) 찬란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는 달리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추리 소설, 역사 소설, 정치 소설 그리고 연애 소설: 일단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을 빌어 소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러니까 추리 소설이나 역사 소설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치 소설이나 역사철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에코의 소설은 작품 전개 과정에 있어서, 그리고 극적인 구도에 있어서 너무 치밀하므로 독자를 압도합니다. 이 점은 분명히 장편 소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한마디로 이 소설에는 -전반부의 교회에 대한 장황한 묘사를 제외한다면- 내용과 무관하거나 불필요한 문장 및 단어는 거의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포스트 모던한 이 소설의 주제는 무엇일까?” 하고 물을 때, 우리는 어떤 당혹한 느낌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장미의 이름"은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읽을 수 있는 추리 소설이자, 역사 소설이라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또한 그것은 교황과 황제의 갈등으로 묘사되는 정치 소설이며, (부분적으로는) 탁월한 연애 소설입니다. 또한 (혹은?) 역사 철학적 내용을 담은 사변 소설이기도 하며, 웃음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에 관한 철학 소설이기도 합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인터뷰나 글을 통하여 자신의 소설에 대하여 ‘단 하나’의 주제를 직접 토로하지 않고, ‘여러 가지’의 주제들을 암시한 바 있습니다. 그렇기에 독자는 자크 데리다가 의심한 바 있는 “원래 글의 다양한 해석학적인 코드”들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절충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따라서 -에코 역시 주장한 바 있지만- 우리 자신의 관심과 합당한 주제는 임의로 도출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에코는 현대적인 무엇을 암시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집필하지는 않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 (Eco: 84: 56) 이는 작가의 의도를 최대한 사장 (死蔵)시키고, 창조적 수용의 가능성을 개방시키게 작용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배제한 문학적 향수 (享受)가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특성은 이탈리아 문학에서 자주 나타나는 유형인 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코의 소설 역시 통속 소설과 본격 소설 사이의 구분을 희석 (稀釈)시키고 있습니다. 실제로 에코는 통속성의 예찬을 통해서 순수 소설의 대중적 전파 가능성을 유도하였던 것입니다. 에코의 이러한 입장은 탈 현대성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사람들의 “절충주의의 표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고로 모든 담론 내지는 모든 주제를 용인한다는 것은 일견 다양성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이해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에코의 일견 관대한 태도는 본질적으로 고찰할 때 주어진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적 문제점을 희석시키고 망각하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