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서로박: 만인의 자유와 평등. 3.

필자 (匹子) 2020. 12. 3. 10:59

4.

블로흐는 시민사회에서의 제반 법학이론이 하나의 권력이데올로기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시민주의 문화와 예술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부분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훌륭한 성분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법학의 대부분의 내용은 파기 대상으로 간주되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법학이 권력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나타납니다. 젊은이들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서 법학을 전공하지만, 나중에 어처구니없게도 법학 전공자라는 선민의식과 신분상의 특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자고로 힘은 개인보다는 그룹으로, 그룹보다는 국가로 쏠립니다. 인간의 욕망은 권력과 금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향하는 내향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블로흐는 역설적으로 약간의 편향적 자세를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우리는 권력자 그리고 부자 대신에 개인과 민초의 권익에 두 배 이상의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친애하는 K, 당신과 같이 법을 전공한 사람들은 국가의 상부나 권력 구조에 배타적이어야 하며, 대신에 인민의 권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현실의 토대가 이미 권력과 금력에 의해 계층적으로 분화된 채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항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블로흐는 실정법을 비판하고 자연법을 하나의 법 유토피아로 설정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현대의 법 철학자들은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고 하였습니다. 가령 라드브루흐는 법의 상대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주주의를 엄정 중립적인 타당성으로 정당화시켰습니다. 그런데 주어진 현실 내의 권력 구도가 이미 편향적인데, 어떻게 형식 논리적으로 수직의 추를 드리울 수 있을까요? 라드브루흐는 중립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개인보다는 입법자에게 모든 권리를 떠맡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극단의 시대에 중심을 잡기 위한 공정함의 추는 수직이 아니라, 사선 斜線으로 드리워져야 합니다.

 

는 아르투르 카우프만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카우프만은 가다머의 해석학을 도입함으로써, 법이 당위와 존재 사이의 일치되는 무엇이라는 절충적 입장을 더욱더 비비꼬아 놓았습니다. 이로써 그가 내세우는 것은 “해석학적 나선형”입니다. 카우프만의 관심사는 오로지 법이념 (당위)과 사례 (존재)를 서로 절충하여 하나의 이성적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의 시각은 재판관의 관점만 부각시킬 뿐, 재판 당하는 사람의 관점을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법 바깥에서 법을 고찰했다면, 그는 웅장하지만, 초라한 법원 건물을 분명하게 인지하였을 것입니다. 법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 (성당)의 유리창과 같습니다. 그것은 내부에서는 오색영롱한 갈망의 상으로 비치지만, 바깥에서는 회색의 차단막으로 반사되는 암울한 상으로 비칩니다.

 

5.

번역이 끝나갈 무렵, 신문에는 조봉암 선생의 무죄 확정 소식이 실렸습니다. 선생은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했습니다. 사법 살인이 자행된 것이었지요. 당시 나는 코흘리개 아이였습니다. 동아일보를 읽던 아버지가 눈물을 글썽거렸는데, 영문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은 초등학교 1학년 통지표에 내가통솔력이 없다.”고 적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자유 없는 나라에서 통솔력 없는 것이 다행입니다.” 법학을 전공한 아버지가 어째서 생전에 그토록 루소를 흠모하였는지, 이제야 이해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