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프리츠 루돌프 프리스의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

필자 (匹子) 2020. 11. 27. 10:11

친애하는 F, 오늘은 프리츠 루돌프 프리스 (Fritz Rudolf Fries, 1936 - )의 문학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프리스는 1936년에 에스파냐의 빌바오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에스파냐의 파르티잔에 체포되어 총살당했습니다. 1942년 가족들은 라이프치히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그의 이력은에스파냐라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동독이라는 전체주의 국가로 이주한 삶”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프리스의 뇌리에는 유년의 참혹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즉 40년대 초 연합군에 의해서 처참하게 폭격당한 라이프치히가 바로 그 상흔이었습니다.

 

프리스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영문학 그리고 에스파냐 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당시 라이프치히 대학에는 탁월한 교수들이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 Ernst Bloch, 독문학자 한스 마이어 Hans Mayer 그리고 불문학자 베르너 크라우스 Werner Krauss 등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프리스는 나중에 통역 외에도 에스파냐 문학, 특히 칼데론, 세르반테스, 네루다 등의 문학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소설가, 호세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1899 - 1986)의 전집 간행에 관여했습니다. 프리스는 1960년부터 1966년까지 베르너 크라우스의 곁에서 일하면서 동독 학술 아카데미에서 일했습니다.

 

프리스는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 그리고 주제 상으로 훌륭한 문학 작품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관점의 도입이라든가 사회의 당면 문제를 넘어서는 시대적 고뇌 등을 담고 있는데, 이는 프리스 문학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동서독 사람들은 프리스의 문학을 활발하게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구동독 평론가들은 프리스의 문학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였습니다. 구동독에서 살고 있는 신인 작가가 함부로 서방세계에 작품을 발표했다는 것은 핑계거리에 불과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프리스 문학적 주제가 “비터펠트 운동” 이후에 구동독에서 정착된 “도달 문학 Ankunftliteratur”과 근본적으로 거리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프리스의 문학은 체제안주와는 거리감을 지니며, 작품의 주인공들은 방랑과 모험 그리고 여행을 즐깁니다. 이로써 그들은 새로운 삶을 동경하고, 주어진 현실의 따분한 삶으로부터 일탈하려고 하며, 궁극적으로 유토피아의 흔적을 찾으려고 합니다.

 

 

 

프리츠 루돌프 프리스 (1935 - ):그는 약 스무 편의 탁월한 소설을 발표했는데, 작품은 유감스럽게도 예술적 탁월성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단 작품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 Der Weg nach Oobladooh』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1966년 구서독에서 간행되었습니다. (프리스는 작품을 서독으로 유출했다는 이유로 구동독에서 작품 발표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오블라두 Oobladooh”라는 표현은 미국의 흑인 재즈 음악가, 디지 질레스피 Dizzy Gillespie의 노래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디지 질레스피는 주로 트럼펫으로 연주하였는데, 간간이 노래도 불렀다고 합니다.나는 오블라두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멋진 공주를 알고 있네.

 

여기서 오블라두는 주어진 현실과는 다른 찬란한 이상적 공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소설은 1956년에서 1957년 사이의 시점의 이야기이며,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그리고 베를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아를레크 Arlecq, 파아쉬 Paasch라는 이름을 지닌 두 명의 남자입니다. 아를레크는 에스파냐 고전문학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번역가입니다. 그는 간간이 통역의 일로 생활비를 벌곤 합니다. 아를레크는 “신이 자신을 눈멀게 만들 때까지 먼 지역으로 떠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에스파냐 출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스페인 문학을 번역하고 통역사로 일한다는 점 등은 작가와 매우 유사합니다.

 

또 다른 주인공, 파아쉬는 느긋한 심성의 소유자로서 의학을 전공한 치과의사입니다. 영리한 사람이지만, 학업에 충실하지는 않았습니다. 파아쉬는 의사 채용 국가시험에 여러 번 낙방한 다음에 치과의원을 개업합니다. 두 사람은 사회주의의 삶에 고통을 느낍니다. 게다가 진보를 찬양하는 사회적 강령은 그야말로 역겨움의 대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과학에 대한 맹신적 사고는 그들의 눈에는 천박한 유용성으로 비칠 뿐입니다. 유토피아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현실과 화해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특히 파아쉬의 경우는 국외자의 삶을 보여줍니다. 치과의사로서 하루 종일 환자의 입속을 들여다보며 시술하는 그의 생활은 단조롭고 갑갑합니다. 그래서 저녁만 되면 찾아가는 곳이 재즈 음악과 음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파아쉬는 어느 평범한 여성을 사귀게 되었는데, 깊은 사랑의 감정 없이 그미와 살을 섞게 됩니다. 술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단 한 번의 섹스로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파아쉬는 이에 대해 엄청난 부담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술과 음악에 탐닉하게 됩니다. 파아쉬는 더 이상 직장, 결혼 생활 그리고 자식 등과 같은 책임과 의무만을 준수하는 삶의 패턴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책임과 의무만을 강요하는 따분한 일상은 그에게 부자유를 강요하는 굴레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파아쉬는 “자기 자신, 이름, 신분, 직업 및 가족 등을 음악의 파기 작용 속에서 용해”시키려고 합니다. (52쪽).

 

아를레크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안온한 에스파냐를 떠나서, 낯설기 이를 데 없는 라이프치히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전후의 라이프치히는 끔찍한 폐허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를레크는 세계대전 동안에 아버지가 전사했기 때문에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받았으나, 마냥 자신의 상흔을 은폐하면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가 슬픔을 억누르는 것은 자신의 불안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심리적 방어기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를레크는 지금까지 오로지 여성의 품에서 안온함과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여성의 따뜻한 품은 마치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속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안전한 집과 같은 무엇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심리적 위안을 부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이었습니다. 유약한 어머니, 에스파냐 출신의 할머니, 간호원 에리카 그리고 병원의 환자, 루트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끔찍하고도 참혹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대상이라고 느낍니다. (99쪽)

 

 

 

라이프치히에서 재판으로 간행된 작품의 표지

 

어느 날 아를레크는 에스파냐 출신의 젊은 여성을 사귀게 됩니다. “낯선 땅의 낯선 여자는 마치 집시처럼 우울한 표정을 짓지만, 가볍고도 강한 사랑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20쪽) 주인공은 순간적으로 이사벨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미는 자신의 잃어버린 유년의 고향 흔적을 자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에스파냐어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친밀하게 지냅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몸을 탐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아를레크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몸이 그미를 통해서 깊은 욕망의 늪에 빠져드는 것을 감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사벨을 처음부터 이상적인 여인으로 치켜세우곤 합니다. 에스파냐 그리고 에스파냐의 언어는 주인공에게 고향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주인공은 이사벨에게 ”에스파냐의 이상적 여인“인 ”마리아 돌로레스“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렇지만 여성을 마냥 이상화하려는 아를레크의 태도는 이사벨에게 오히려 내적으로 부담감만 키워줍니다. 이사벨의 입장에서 볼 때 주인공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미리 자신의 상을 설정하여, 그 상만을 사랑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이 내적으로 떠올린 이상적 상에 적용된다는 것 자체가 이따금 불쾌했던 것입니다. 결국 임신한 이사벨은 주인공과의 결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다른 남자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어느 날 파아쉬는 깊은 밤 도시를 배회하다가 아를레크와 조우합니다. 아를레크는 이사벨과 헤어진 뒤에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파아쉬는 임신한 여인 때문에 원치 않는 결혼식을 올려야 했습니다. 두 남자는 더 이상 현실에서 그들의 행복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술과 마약에 경도하는 짓거리밖에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날 아를레크는 동베를린에서 체제에 반대하는 삐라를 살포하다가 경찰에 의해서 체포됩니다. 다행히 초범인 그는 며칠 후에 풀려나게 됩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지긋지긋한 속물과 관료주의의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서 서베를린으로 건너갑니다. 서베를린에서 그들이 발견한 현실은 처음에는 마치 꿈과 같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를레크가 발견한 꿈의 현실은 검열과 자기검열이라고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는 작품 발표회의 공간이었으며, 파아쉬가 발견한 꿈의 현실은 동독에서 접할 수 없는, 음악적 재기발랄함이 여지없이 표출되는 재즈 콘서트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들의 꿈은 찬란하게 실현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서베를린은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익명의 자아들은 망각의 파도 속에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 역시 A. 그리고 P.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베를린은 그들이 동경한 유토피아의 공간이 아니라, 소비를 위한 고객의 공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다시 동독으로 건너갑니다.

 

구동독의 공안당국은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든 두 명의 사내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아를레크와 파아쉬는 “공화국 탈출”이라는 혐의를 모면하기 위해서 기지를 발휘합니다. 즉 두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서독으로 납치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누군가 신문에 실린 유명 인사 두 사람을 추적하였는데, 아를레크와 파아쉬를 유명 인사로 착각하여, 억울하게 서베를린으로 강제로 납치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신원이 밝혀지자 서독의 비밀요원은 두 사람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술에 취해서 거리를 활보하다가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는데, 힘없는 그들로서는 이에 대항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아를레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버림받은 사람이 자신이라고 믿습니다. 깊은 고독의 심연에서 그를 도와준 사람은 바로 여성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를레크는 안네라는 여성을 사귀게 되어, 조용히 현실에서 안주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파아쉬는 정신 병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혈액 속의 과도한 알코올 농도” (280쪽)로 인하여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간간이 죽음을 떠올리곤 합니다. 아를레크는 친구 파아쉬와 작별한 다음에 아무런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납니다.

 

친애하는 F, 이미 언급했듯이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은 주제상으로 그리고 소재에 있어서 도달문학과는 정반대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작품은 개인의 행복, 삶의 순응의 문제 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70년대에 나타난 신주관주의의 문학적 경향을 선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학문적 예술적 분위기에서 답습한 것입니다. 이는 루카치의 문학적 경향을 수용한 게 아니라, (블로흐 예술론에서 강조되는) 더 나은 현실에 대한 동경의 실험 문학적 수용에서 발견됩니다.

 

나아가 프리스는 구동독의 젊은 지식인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다루었습니다. 60년대 구동독의 젊은 지식인들에게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긍정적으로 자발적으로 드러낼 출구가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창의성과 자발성의 새싹은 구동독의 관료주의에 의해서 처음부터 꺾여 있었던 것입니다. 두 명의 주인공, 아를레크와 파아쉬가 진취적인 사회의 파이어니어로 노력하는 대신에 개인의 향락적 삶을 추구한 까닭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안젤로 베올코

 

 

“오블라두”는 동화 속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는 무한대의 자유가 자리하며, 평화롭게 사랑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동화 속의 장소는 유토피아의 공간일 것입니다. 이를 고려한다면 “오블라두”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위한 암호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개개인의 “낮꿈” 내지 백일몽 속에서 설계해낼 수 있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주어진 여건을 수정하고 뛰어넘으려는 노력과 관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작품의 제목이 “오블라두”가 아니라, “오블라두로 향하는 길”로 설정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친애하는 F,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항만을 덧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는 두 명의 주인공의 인물을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인민희극 작품인 안젤로 베올코 Angelo Beolco의「직업 연극 commedia dell’arte에서 도출해내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파우스트”처럼 통속적 방언을 사용하는 인민 극작품으로서 주로 일년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인형극, 팬터마임 그리고 거리 연극 등의 방식으로 공연되었습니다. 즐거운 해학과 농담, 에로스를 추구하는 에스파냐 인들의 향락 등은 인간이 추구하는 본능적인 삶에 대한 하나의 범례로서 단식과 기도의 삶을 중요시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를 믿는 많은 프로이센 사람들에게는 낯선 생활방식인데, 작가는 이러한 생활방식을 구동독에서 부활시켜야 한다고 내심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