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loch 흔적들 39

블로흐: 아빠와 딸

블로흐는 에드워드 불워-리턴의 소설 "자노니Zanoni"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다. 주제: 1. 딸에 대한 아빠의 사랑은 무한할 정도이나, 아빠에 대한 딸의 사랑은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2. 예술가의 명성은 후세에 퍼진다. 그런데 당대에서 명성을 떨치는 예술가는 드물다. ....................... 18세기에 늙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살았다. 사람들은 그가 유행에 뒤떨어져 있으며, 연주 실력이 형편없다고 여긴다. 그에게는 친구 한 사람도 없는데, 식솔은 달려 있다. 음악가는 자신의 결혼을 후회하며, 언제나 자신의 방에 칩거했다. 그는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 시에 가급적이면 정확한 시간에 자신의 자리에 착석하지만, 오페라 음악에 대해 신명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리허설이 진행..

28 Bloch 흔적들 2022.01.05

블로흐: 거룩한 식사

오늘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지 않다. 수중에는 돈 한 푼 없다. 아무 것도 없으니, 파리 역시 작은 공간으로 보일 뿐이다. 오래된 식당으로 가보았다. 술과 음식이 형편없는데도, 가격이 무조건 저렴하지는 않다. 식당에는 허름한 차림의 노동자 한 사람이 흔히 말하듯 정당하고도 당당하게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사내는 손가락으로 가재 한 마리를 거머쥔 채, 아귀아귀 뜯어먹고 있었다. 가재의 붉은 껍질을 퉤하고 내뱉자, 껍질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로 이 순간 노동자는 난생 처음으로 소중한 무엇을 얻었다는 듯이, 가재의 부드러운 살에다 알아듣기 쉬운 말로 속삭였다. 참으로 드문 케이스였다. 적어도 여기서는 하나의 상품이 부자들에 의해 능욕 당하지 않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만큼은 돈 없는 자..

28 Bloch 흔적들 2021.11.22

블로흐: 흑인 남자

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떤 당혹스러운 오류에 휩싸이는 순간에 더 생생하게 인지될 수 있다. 어느 신사는 밤늦게 친구들과 함께 어느 호텔에 당도했다. 모든 침대는 이미 다른 숙박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방 하나가 빈다고 했다. 그러나 방안의 침대에는 흑인 남자 한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이곳은 아메리카야, 하고 누군가 말했다. 객실 하나에 여러 사람이 취침해야 하는데도 신사는 방값을 지불했다. 어차피 하룻밤 묵을 수밖에 없었고,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호텔 하인에게 문가에서 취침하게 될 자신을 아침 일찍 깨워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침대에는 흑인이 곤히 잠자고 있으니, 그를 일부러 깨우지 말라는 부탁을 빠뜨리지 않았다. 호텔 종업원과 신사의 친구들은 그 ..

28 Bloch 흔적들 2021.11.07

블로흐: 올리브 먹는 법

독특하고 기이한 음식은 찬탄을 받거나, 조소의 대상이 된다. 이는 올리브 식사에 관한 고대 중국의 이야기를 경청할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이야기는 그야말로 지엽적이고 섬세한 미각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우리는 어떤 기괴함을 느낄 정도이다. 그것은 아주 맛깔스러운 음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그 자체 커다란 의미를 남기지는 못한다. 입안에서 느끼게 되는 순간적 음식 맛은 그 자체 지엽적인 것이지만, 그래도 식객이 자신의 혀 위에서 꿈틀거리는 물컹한 무엇을 느끼게 되면, 최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는 있을지 모른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올리브 식사에 관한 것인데, 아주 오래 전에 중국에서 실제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특별한 사람들은 어느 날 올리브 음식을 맛보게 되었다. 중국의 젊은 작가들은 일 년에..

28 Bloch 흔적들 2021.07.29

블로흐: 터무니없는, 혹은 더 나은 기담

기라르디의 기담은 낮 시간이 아니라, 밤 시간에 시작된다. 그는 밤늦은 시간에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시간을 지체하였다. 그래도 냉정을 유지하며, 빈의 외곽지역으로 향해 서둘러야 했다.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늦은 밤이라서, 도시를 횡단하는 전차 역시 오래 전에 끊겼다. 비싼 돈을 주고 택시를 타야할지, 히칭 구역까지 걸어가야 할지 고심하였다. 기라르디는 결국 걸어가기로 작심한다. 걸어가는 도중에 좁지만 우아한 어느 골목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곳은 홍등가였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지나친 적이 없었다. 건물의 창문에서 환한 빛이 비쳤고, 반라의 여자들이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들은 두 손으로 그에게 열정적인 키스를 보냈다. 이때 오래된 오스트리아의 노란 색의 꽃들로 장식되어 있는,..

28 Bloch 흔적들 2021.06.06

블로흐: 첫 번째 기차

증기기관의 발명자, 조지 스티븐슨의 데뷔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몹시 거친 이야기가 전해온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주전자의 끓는 물을 보고 놀라운 착상을 도출해내었다. 어쩌면 증기의 힘으로 기차의 바퀴가 돌아갈지 모를 일이었다. 발명가는 어설프게 기차 하나를 직조하여, 저녁 시간을 틈타 기차가 거리를 달리도록 조처했다. 처음에 그는 기차를 뒤쫓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기차는 몇 번 칙칙 거린 다음에 달리기 시작했다. 기차의 속력은 점점 빨라졌다. 스티븐슨은 뒤를 쫓았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도로의 끝 간 데에서 즐거운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남자와 여자들이 섞여 있었고, 마을의 목사도 동참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맥주를 마시다가 뒤늦은 시간에 제각기 귀가하..

28 Bloch 흔적들 2021.05.29

블로흐: 작은 출구

깊이 잠이든 사람 역시 혼자 있다. 물론 그는 여행을 떠난 사람처럼 그렇게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잠자지 않고, 술집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벽을 뒤로 하고, 술집 내부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게 하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잠이 들 때 주위를 완전히 차단시킨다. 이로써 그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어두운 방에서 등을 돌리며 잠을 청한다. 우리는 잠들 때 마치 벽이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마치 방이 스스로 무기력하게 변하는 것처럼 느낀다. 잠은 마치 벽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더 나은 죽음으로 다가가게 하는 무엇을 가리킨다고 할까. 잠은 외부의 방해와 낯섦을 논외로 하더라도 마치 죽음을 배우는 행위처럼 보인다. 물론 잠의 무대는 전혀 다르게..

28 Bloch 흔적들 2021.05.11

블로흐: 문의 모티프 (2)

그렇지만 문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결코 여러 가지 구상적인 상을 통해서 드러나지도 않으며,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세계는 언제 어디서든 간에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말없이 나타나 것은 오로지 아주 드문 행복의 감정일 뿐이다. 그렇지만 행복의 감정은 외부로 향해서 확장되고 넓게 퍼져나가는 게 아니라, 대부분 신앙에서 나타나듯이 기껏해야 “상부”로 향해 방향을 설정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라지는 장소 또한 행복의 신들이 자리하는 공간이 아니라, 끔찍한 경악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인지될 수 있다. 문의 배후가 어떠한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추론하고 예견하는 방식으로 유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악이나 희열을 안겨주는 현실적인 영역을 뛰어넘는, ..

28 Bloch 흔적들 2021.04.19

블로흐: 문의 모티프 (1)

아름다운 처녀, 릴은 사랑하는 사내와 함께 마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언급되는 영화는 1921년에 프리츠 랑 Fritz Lang에 의해 만들어진 『피곤한 죽음Der müde Tod』을 가리킨다. 이 제목은 “지쳐버린 추수꾼The weary Reaper”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영국에서는 “운명Destiny”이라는 제목으로 상연된 바 있다.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공연한 배우는 릴 다고버Lil Dagover이다. - 역주) 그들이 타고 가는 우편 마차 속에는 두 사람밖에 없다. 마지막 정류소에서 어느 나이 지긋한 사내가 승차하게 되었다. 그의 눈길은 아름다운 릴에게로 향한다. 그미의 남자는 몹시 피곤하게 보인다. 그의 완강한 얼굴에는 강인함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마차는 성문을 지나서 소도시 안으로..

28 Bloch 흔적들 2021.04.19

블로흐: 상의 비밀

건강히 잘 지내니? 하고 우리는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 사람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든 게 잘 진척되리라고 지레짐작하는 것 자체가 놀랍지 않은가? 이에 대한 대답은 미리 정해져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잘 지내는 것 외의 다른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지 모른다. (...) 오래된 소도시에서 저녁식사 시간에 포도주 한 잔을 마신다. 식당 밖에는 시장터가 보인다. 광장 주위에는 얼룩덜룩하고 각이 진 건물들이 멋지게 둘러싸여 있다. 바로 이 순간 건물의 발코니 그리고 돌출된 창에서 행복의 근원을 전해주는 빛 그리고 음이 은은히 퍼져 나온다. 이러한 빛과 음은 그야말로 내면의 꿈처럼 평화로움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다. 행복하고 안온한 분위기는 마치 주위의 건물에서 저절로 퍼져 나오는..

28 Bloch 흔적들 2021.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