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처녀, 릴은 사랑하는 사내와 함께 마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언급되는 영화는 1921년에 프리츠 랑 Fritz Lang에 의해 만들어진 『피곤한 죽음Der müde Tod』을 가리킨다. 이 제목은 “지쳐버린 추수꾼The weary Reaper”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영국에서는 “운명Destiny”이라는 제목으로 상연된 바 있다.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공연한 배우는 릴 다고버Lil Dagover이다. - 역주) 그들이 타고 가는 우편 마차 속에는 두 사람밖에 없다. 마지막 정류소에서 어느 나이 지긋한 사내가 승차하게 되었다. 그의 눈길은 아름다운 릴에게로 향한다.
그미의 남자는 몹시 피곤하게 보인다. 그의 완강한 얼굴에는 강인함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마차는 성문을 지나서 소도시 안으로 서서히 달린다. 어느 여관의 간판 아래에서 우편 마차가 정차한다. 나이든 사내는 사랑하는 두 연인의 뒤를 따라서 식당으로 들어간다. 공교롭게도 그는 두 사람과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그는 젊은 남자에게 술을 권한다. 젊은 남자의 술잔은 그리고 릴이 마신 술의 술잔은 일순간 놀랍게도 모래시계로 변하는 게 아닌가?
릴의 눈에는 모래가 모래시계 속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기분 나쁜 예감에 릴의 모골이 송연해진다. 바로 이때 릴의 술잔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술잔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만다. 그미는 여관집 주인에게 다가가, 이 사실을 알린 뒤에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착석했던 테이블은 텅 비어있다. 강인한 표정의 남자 그리고 나이든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순간 손님들은 다음의 사실을 알려준다. 젊은 남자는 나이 든 사내와 함께 문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었다. 릴은 황급히 식당 밖으로 나와 두 사람를 찾기 시작한다.
어느 거지가 두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알려주었다. 릴은 바로 그 방향으로 길을 떠났다. 아니, 순간적으로 사람이 사라지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어느 야경꾼은 낯선 두 사내가 소도시의 끝자락을 지나쳤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릴은 숲과 어둠이 내려앉으려고 하는 들판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 지역의 마지막 가장자리에는 어떤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돌담이 연이어져 있었다. 돌담은 마치 거대한 원을 그리는 것 같았다. 출입구라고는 하나도 없는 장벽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달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들판 멀리서 행인들이 무리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나이를 구분할 수 없는 남녀들이었다. 농부, 시민, 신부들이 보였고, 오래 전에 살던 기사와 왕도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안개 속에서 느릿느릿 걸어오는 중이었다. 그들 한복판에는 릴의 연인이 있는 게 아닌가?
릴은 그에게 다가가서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포옹하기 위해서 그의 몸을 낚아채어 자기 쪽으로 당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림자는 릴에게 눈길을 보내더니, 끝없이 멀어졌다. 그미의 남자는 피곤에 지친 채 다른 사람들과 행군하다가, 마치 시신이라도 되는 듯이 순식간에 장벽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릴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릴은 소도시에 거주하는 어느 약사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약사는 보름달이 화창한 시각을 택해 약초를 수집하기 위해서 이곳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쓰러져 있는 젊은 여자를 발견했던 것이다. 약사가 채집한 약초는 이 지역에서 자라는 아르니카, 체꽃의 잎사귀, 동굴레 잎 그리고 용담의 잎 등이었다.
약사는 비몽사몽간의 처녀를 등에 업고, 황급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릴을 내버려두고 그미를 위해서 기력을 돋게 하는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릴은 테이블 곁에서 쓰러져 있었다. 주위에는 증류기가 놓여 있었고, 소금, 황 수은 그리고 독이 든 플라스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많은 책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린 릴은 주위를 둘러본다. 그미는 그 가운데 펼쳐진 성서의 한 구절을 접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죽음만큼 강렬한 것이다.” (구약성서,「아가서」 8장 6절. - 역주)
죽음이라는 단어를 접하자 소름이 끼쳤다. 죽음은 에너지 그리고 무게 사이의 마력적은 균형 사이에서 이해되고 평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순간 릴은 독이 든 병을 거머쥔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개를 열어 제치고 독을 벌컥 들이마신다. 이윽고 그미는 장벽 앞에 서 있게 된다. 처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마 위를 더듬어 본다. 거기에는 지극히 낯선 물체가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릴은 안온하고도 노란 빛을 받으면서 몽유하다가, 다시 깊은 잠이 들었다. 장벽 주위의 공간은 더 이상 폐쇄되어 있지 않았다. 환한 불빛을 통해서 장벽 사이에 하나의 구멍이 뚫어져 있는 게 보였다. 뒷부분에는 끝없이 퍼지는 빛 주위로 고딕 양식의 대문이 눈에 띄었다.
대문 뒤에는 깊은 곳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만일 대문의 아래의 깊은 곳이 환한 빛을 받고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곳의 모습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수많은 촛불이 빛을 발해야만, 죽음의 방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문의 배후는 깨어났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명확히 파악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영화의 스토리이다. 대문은 영화 관객으로 하여금 주위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삶의 처지를 인지하게 해준다. (그것은 “너 자신의 일이다.” (“너 자신의 일이다.”는 호라티우스의 시구의 일부이다. 정확한 행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이웃의 집이 불타고 있으면, 그것은 너 자신의 일이다. Nam tua res agitur, paries cum praximus ardet.” Horaz: Epistulae, 1: 18. - 역주)) 통속적인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그것은 묘하게도 관객에게 깊은 감흥을 전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출구와 입구의 동시성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대문이 내포하고 있는, 어떤 근원적인, 치명적 상징성을 의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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