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흐는 에드워드 불워-리턴의 소설 "자노니Zanoni"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다. 주제: 1. 딸에 대한 아빠의 사랑은 무한할 정도이나, 아빠에 대한 딸의 사랑은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2. 예술가의 명성은 후세에 퍼진다. 그런데 당대에서 명성을 떨치는 예술가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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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늙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살았다. 사람들은 그가 유행에 뒤떨어져 있으며, 연주 실력이 형편없다고 여긴다. 그에게는 친구 한 사람도 없는데, 식솔은 달려 있다. 음악가는 자신의 결혼을 후회하며, 언제나 자신의 방에 칩거했다. 그는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 시에 가급적이면 정확한 시간에 자신의 자리에 착석하지만, 오페라 음악에 대해 신명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혼란스러움을 느끼는지, 다른 사람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이 때문에 단순한 박자를 못 맞추는 경우가 가끔 발생한다.
누군가 궁정 오페라 연주가 1750년경에 독일 왕궁에서 개최되었다고 기술하였다. 그런데 궁정 극단은 이탈리아 방식으로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결정했는데, 음악가는 이러한 방식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맡은 부분을 의도적으로 약하게 연주하곤 하였다. 이는 지휘자에게는 무성의한 태도로 비치게 된다. 그래서 음악가는 지적당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더 잘 연주하겠다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페라 연주 방식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단원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박봉에 시달리고 있었다. 너무 적은 월급으로 아내와 젊은 딸을 배불리 먹일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궁정악장을 여러 번 찾아가, 제발 남편을 내치지 말라고 간청했다. 이 때문에 그럭저럭 악단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다. 음악가는 아내가 궁정악장과 몰래 만났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와 자주 언쟁을 벌였다. 아내는 한술 더 떠서 그의 어설픈 연주와 이로 인한 갈등 등을 딸에게 곧이곧대로 전하고 말았다. 사실 음악가는 자신의 딸을 극진하게 사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성악을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사랑하는 딸조차도 이제 와서 아버지의 예술적 무능을 지적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심지어 아내는 딸이 게을러빠진 가장과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못하도록 조처했다.
저녁마다 개최되는 리허설 연주가 끝나면 음악가는 자신의 방에 칩거했다. 아무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곳에서 음악가는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때로는 바이올린의 선율에 맞추어 노래했는데, 그의 비명 소리는 자정 늦게까지 이어졌다. 음악가는 때로는 흐느끼기도 하고, 깡충깡충 뛰면서, 자신의 자유로운 상상을 노래와 연주로 표출했던 것이다. 때로는 그의 연주는 악보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저녁 아름다운 처녀로 자란, 수줍은 딸이 연습실의 계단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음악을 감상하는 게 아닌가? 사실인즉 딸은 이불 아래에 마대를 숨긴 다음에, 틈만 나면 아버지 방으로 잠입했다. 어머니는 가족 몰래 숨겨놓은 돈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어쨌든 딸 역시 비밀스러운 음악 연주에 동참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음악가는 비교적 일찍 리허설 공연을 마치고 귀가했다. 이때 딸은 몹시 당황한 듯이 자신의 책상에 서성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딸은 돈을 든 채 몹시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그의 서랍은 반쯤 열려 있었다. 어제 저녁 누군가 악단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약간의 돈을 건네주었는데, 음악가는 부족한 현금을 충당하기 위해서 돈을 자신의 악보와 함께 서랍 속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이번 오페라 공연에서 청중의 반응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관객으로부터 찬사 받기는커녕, 아예 더 이상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제 2막 “세이렌” 공연 음악 연습이 끝날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딸은 아버지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아야 했다. 그때부터 그미는 정규 공연 시간에 언제나 아버지의 방에 머물러야 했다. 이때 딸은 아버지의 악보를 보면서 은밀하게 피나는 연습을 거듭했다. 어느 날 음악가는 악단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오페라 공연을 편성하려고 했을 때, 그는 특정 작곡가의 작품을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작곡가의 작품은 너무 유행을 따르고 있으며, 음악적 수준 역시 형편없다는 게 그의 항변이었다. 그렇지만 파면 소식을 접했을 때, 음악가는 거의 절망적 상태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이 무렵 자신의 딸이 오페라 악단에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퍼지게 된다. 딸의 성악 실력은 그야말로 새로운 기적과 같았고, 추기경의 도움으로 장차 미래의 프리마돈나로 발탁되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에도 음악가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새로운 여가수의 찬란한 데뷔의 시간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음악가는 자신을 더욱더 학대했다. 사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일용직 작곡가로서 어떤 새로운 오페라 악보를 제작해야 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방에 칩거한다. 이때 밖에서는 여러 가지 소식이 퍼졌다. 이를테면 오페라의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는 사실, 새로운 오페라 음악 제작이 너무 느리게 진척된다는 사실 그리고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제후가 오페라 제작의 문제에 관여했다는 스캔들 등이 그러한 소식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방에 칩거하는 음악가는 외부의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드디어 딸의 첫 공연 시간이 도래했다. 이 순간에도 음악가는 자신의 방에서 작곡에 골몰하고 있었다. 바로 이 때 낯선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 극단의 단장이 보낸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집 앞에는 오페라 극장으로 향하는 고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음악가는 처음에는 오페라 공연에 참석하기를 거절했으나, 오랜 설득 끝에 자신의 딸이 무대에 오르는 극장으로 향하게 된다. 극장에 도착하니, 오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홀에서는 거칠고 힘찬 노래소리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음악가의 귀에 매우 친숙한 것이었다. 음악가가 홀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딸은 세이렌으로서 바다 물결의 황량함을 소프라노 음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상기한 이야기는 매우 드물지만, 얼마든지 실제 현실에 출현하며, 우리를 감동시킨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무엇이 당신에게 가장 소중하겠는가? 이러한 문장은 그 자체 무례하지만, 딸이 아버지에게 전할 수 있는 발언일지 모른다. 어쩌면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일자리를 빼앗은 처녀를 오랫동안 역겹게 느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얼마든지 덮어버릴 수 있다. 다른 한편 아버지는 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기야 사랑에 이타주의가 자리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딸은 음악가의 방에서 돈을 훔친 게 아니라, 몰래 악보를 가지고 가서, 그것을 필사하였다. 이때 그미는 행여나 아버지에게 들킬까 하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이를 철저하게 감추었던 것이다. 물론 사랑 받는 딸이 비밀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음악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창출해낸 셈이다.
자고로 여성은 지금까지 연인으로서 열렬히 칭송되고, 좋은 아내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감사의 대상이 되며, 어머니로서 존경을 받곤 하였다. 그런데 딸의 존재로써 여성을 찬양하는 노래들은 기이하게도 그다지 많지가 않다. 그렇지만 상기한 이야기에서 처녀는 음악가에게 특별한 뮤즈로 각인되고 있다. 물론 그미의 목소리가 파르나소스의 막강한 에너지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딸은 모든 것을 치밀하게 준비하여, 은밀한 방식으로 음악적으로 놀라운 실력을 쌓았던 것이다. 무릇 예술가의 명성은 당대가 아니라, 후세에 이르러 찬란히 퍼져 나가는 법이다. 그렇기에 처녀에게는 당연히 후세의 찬란한 명성을 얻게 될 권한이 있다.
이탈리아의 속담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시간은 불공정함을 보상한다. Tempo è gentiluòmo.” 자고로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성 그리고 감추어진 탁월한 능력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반드시 보상받게 되어 있다. 고결한 딸은 자신의 예술적 능력을 너무나 멋지게 실천했으므로, 음악가는 불공정하다고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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