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loch 흔적들

블로흐: 문의 모티프 (2)

필자 (匹子) 2021. 4. 19. 09:57

그렇지만 문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결코 여러 가지 구상적인 상을 통해서 드러나지도 않으며,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세계는 언제 어디서든 간에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말없이 나타나 것은 오로지 아주 드문 행복의 감정일 뿐이다. 그렇지만 행복의 감정은 외부로 향해서 확장되고 넓게 퍼져나가는 게 아니라, 대부분 신앙에서 나타나듯이 기껏해야 “상부”로 향해 방향을 설정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라지는 장소 또한 행복의 신들이 자리하는 공간이 아니라, 끔찍한 경악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인지될 수 있다. 문의 배후가 어떠한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추론하고 예견하는 방식으로 유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경악이나 희열을 안겨주는 현실적인 영역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적인 영역과 결부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의 상은 우리의 예견 속에서 전혀 달리 나타날 수 있을지 모른다. 가령 “지옥”은 우리가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풍요롭고 긴장감 넘치며,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에 “천국”은 생동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 내지 언어를 통해서 지루하고 흐릿한 공간으로 인지될지 모른다. 말하자면 천국은 찬란한 행복이 넘치처 흐르는 공간이 아니라, 마치 시민 사회의 무료하고 따분한 일요일의 삶처럼 끔찍하고 위험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때로는 부수적으로 천국에서 비치는, 어떤 생동감 넘치는, 흐릿한 반사광을 접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문의 모티프가 안내하는 것이 흐릿한 반사광이지만, 그래도 이것이 바로 안으로 들어서는 행위 자체일 뿐, 하나의 낯설고 거대하게 이행되는, 놀라운 스펙터클의 현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중국에서 유래하는데, 문의 모티프에 관한 상당히 의미심장한 내용을 들려준다. 그것은 예술가의 예술 작품 창작의 힘든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로써 독자는 찬란한 섬, 오르플리트Orplid의 놀라운 향기와 음향을 알 듯 모를 듯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르플리트는 독일의 시인 에두아르트 뫼리케 (Eduard Mörike, 1804 - 1871)가 상상한 이상적인 섬을 가리킨다. 뫼리케는 그의 친구 루드비히 아만두스 바우어와 함께 「오르플리트의 마지막 왕 Der letzte König von Orplid」(1853)를 집필 발표했는데, 나중에 소설 『화가 놀텐 Maler Nolten』(1832)을 개작하는 과정에서 이 작품을 삽입시켰다. - 역주) 언젠가 몽테뉴는 세네카의 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현명한 사고를 마력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철학의 행위는 죽음을 배우는 일을 가리킨다.”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철학의 행위는 죽음을 준비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발언은 플라톤의 문헌 『파이돈Φαίδων』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로써 죽음은 영혼의 해방과 관련되었는데, 철학 행위와 죽음 사이의 상관관계는 플라톤 이래로 끊임없이 논의된 바 있다. 역주)

 

그밖에 북동 아시아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종말에 관한 여러 모티프가 회자된 바 있는데, 예술적 작업실의 문은 마치 죽음의 문처럼 기능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야기는 분명한 상을 통해서 진지하게 우리의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데, 이처럼 곧바로 예술적인 곡예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경우는 유래가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더 이상 강화시키거나 비약시키지 말고, 그저 어떤 유희 내지는 하나의 순수한 갈망으로 받아들이면 족할 것 같다. 물론 작품 속에 언급되는 새로운 깃발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지만, 이것은 세상의 투쟁으로부터의 도피 이상의 의미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객관적 상관물임에 틀림없다.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 나이든 화가는 친구들을 만나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어떤 공원이 그려져 있었다. 하나의 좁은 길이 부드럽게 뻗어져 있었는데, 나무와 호수를 지나치면서 계속 이어졌다. 좁은 길은 어느 왕궁의 자그마한 붉은 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림을 한참 들여다본 다음에 몸을 화가에게 돌렸다. 그러나 그들의 옆에 있던 화가는 더 이상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 붉은 색 자체가 기괴한 마법을 부렸는지 몰라도, 화가가 자신의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좁은 길을 지나 놀라울 정도로 붉은 문 앞에 당도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가는 몸을 돌려서 친구들을 향해 미소를 짓더니, 문을 열고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헝가리 출신의 작가, 벨라 발라즈Béla Balázs는 자신의 『일곱 동화Sieben Märchen』에서 마치 그게 어디론가 사라지는 신화적 이야기의 속편인 것처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Siehe Béla Balázs: Sieben Märchen 1921, Nabu Press: Berlin 2021.)

 

몽상에 사로잡히는 청년, 한체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한체는 아름다운 처녀, 리판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리판은 한사코 그의 구애를 뿌리친다. 아름다운 그미를 위해서 한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리판을 위한 시 작품집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그는 은빛 사과나무 꽃이 환하게 피어있는 계곡에 관해 시를 쓴다. 너무나 아름다운 호수 그리고 비취로 이루어진 하나의 성을 묘사하기도 한다. 한체가 상상하는 공간은 참으로 휘황찬란한 곳이었다. 예술적으로 보이는 찬란한 암벽 아래에서 사람들은 축제를 벌이고, 선남선녀들이 서로를 껴안고 춤을 덩실덩실 추고 있다. 

 

달은 은빛 사과나무 꽃이 만개한 계곡 아래를 계속 비춰주고 있다. 한체는 마력적인 언어를 활용하여 자신이 꿈꾸는 바를 멋지게 표현했다. 이따금 그는 사랑하는 리판을 책에서 불러내어, 실제로 그미와 함께 멋진 하루를 보낸다고 상상하곤 했던 것이다. 이로써 그의 삶은 두 가지의 극한적인 처지로 분할되고 있다. 그 하나는 외롭게 보내야 하는 고독의 삶이었고, 다른 하나는 리판과 황홀한 사랑을 나누는 가상적인 갈망의 삶이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비밀스러운 창조 작업 속에서 이루어졌다. 한체는 공상 속에서 희열을 만끽했지만, 이러한 희열의 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꿈결 같이 사라지곤 하였다.

 

어느 날 아침 한체의 친척들은 그의 오두막을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한체는 어디론가 출타 중이었다. 누군가 책상에 그의 시집이 펼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며칠 전까지 작업한 시집의 마지막 장이었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한체, 은빛 사과나무 꽃이 만개한 계곡에 도착하다.”였다. 말하자면 작가 자신이 작품 속에 잠입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가련한 우리의 주인공은 영원한 글자의 영역을 벗어나, 어떤 문으로 다가가서, 문 뒤에 자리한, 이른바 장벽의 배후로 빠져든 셈이었다. 작가 자신이 마지막 대문의 뒷부분으로 향해 뛰어듦으로써, 미학적으로 고찰할 때 실제로 작품 속에서 자신의 갈망이 직접적으로 문학적 현실로 생산된 셈이다.

 

이러한 경우는 구스타프 말러의 마지막 음악에서도 나타난다. 말하자면 작곡가 역시 자신의 아름다우며 고통스러운 정조가 음악적 현실이라는 영역 속으로 투사되어 마구 뒤걲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말러의 마지막 음악은 구스타프 말러의 미완성 교향곡 10번을 가리킨다. 1910년 말러는 교향곡 10번을 작곡하고 있었는데, 건축가 그로피우스가 자신의 아내, 알마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말러는 극도의 절망 속에 빠져든다. 말러는 1911년 뉴욕에서 자신의 교향곡을 발표한 뒤에 사망하였다. 구스타프 말러의 미완성 「교향곡 10번 10. Sinfonie Fis-Dur」은 1924년 빈에서 프란츠 샬크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 역주)

 

자고로 문의 배후는 어두침침하다. 이러한 어두움은 최소한 이러한 동화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서 어느 정도 색채감을 지닌 채 우리를 맞이하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어두움 속에는 우리가 갈구하는 갈망이 함께 할 뿐 아니라, 어떤 기이한 세계의 규칙을 간직한 형태라든가, 이러한 규칙의 거주 가능성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기에 앞에서 거론한 중국의 동화는 -비록 마지막 대문의 암흑 근처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알록달록한 꽃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찬란하게 보여준다. 물론 모든 동화는 우리에게 들싸리 버섯과 같은 끔찍한 독을 안겨주지만, 이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어떤 선현의 상에 관한 깊은 내용을 전해준다. 말하자면 동화는 어떤 끔찍한 경악의 과정을 거쳐서, 경건했던 시대의 상 내지 시인보다도 더 심원한 언어 그리고 화가보다도 더 견고한 상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때로는 지상에서 거처를 찾기 어려울 때도 많다. 거주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도착 내지 도달을 뜻하는 상징물을 끝없이 갈구하는지 모른다. 일부는 절반의 실존 속에서 생명력 넘치는 문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고, 일부는 불가능한 실존의 상태 속에서 그저 꿈속에서나마 숙명적인 문을 발견하려고 애를 쓸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찬란한 생명의 피를 들이마시지 못했는지 모른다. 지상에서든 내세에서든 간에 찬란한 공간을 찾으려고 무언가를 실천하지 못한 셈이다. 그래도 집이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문을 통해서 어떤 몇 가지 행복의 상징적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주택자의 괴로움은 문의 배후에 도사린 현실적 갈망의 훌륭한 교원양성소나 다를 바 없다.

 

'28 Bloch 흔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로흐: 첫 번째 기차  (0) 2021.05.29
블로흐: 작은 출구  (0) 2021.05.11
블로흐: 문의 모티프 (1)  (0) 2021.04.19
블로흐: 상의 비밀  (0) 2021.04.07
블로흐: 놀라움  (0) 2021.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