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Bloch 흔적들 39

블로흐: 미라보 백작 (3)

기계조립공은 “진실로 말하건대” 자신이 백작의 후예라고 술회했다. 아니, 자신이 미라보 백작의 후예라고 거의 맹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확인하기에는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별로 없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남자가 지옥, 혹은 천국으로 향하기로 되어 있는, 결코 사멸되지 않는 영혼을 지녔다든가, 어느 하녀가 부엌 한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든가, 기계 조립공이 자신을 물화시켜 바라본다든가 하는 일밖에 없다. 사내는 순간적으로 생각에 잠긴다. 까놓고 말해서 매일 아침, 온갖 수수께끼로 가득 찬 신문기사, 거리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업무 등은 얼마나 진실과 거리감을 지니고 있는가? 일상적으로 주어진 질서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을까? 주어진 현실 ..

28 Bloch 흔적들 2020.10.14

블로흐: 미라보 백작 (2)

하인의 신분에서 주인의 신분으로 비약하여, 가난을 일거에 떨치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보기 드문 특수한 형태일 것이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등장하는, 솥 수선공 크리스토프 슬리가 바로 이러한 유형의 인물에 해당한다.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1594)는 셰익스피어의 2막 희극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파도바의 부자 밥티스타의 두 딸, 카타리나와 비엔카 그리고 어느 미망인 여인이 그들이다. 카타리나는 난폭하여 어떤 남자도 청혼하지 않는데, 페트루치오는 그미를 일단 자신이 고안한 훈련을 통해서 카타리나를 길들인다. 나중에 세 신부 가운데 신랑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여자는 카타리나로 밝혀진다...

28 Bloch 흔적들 2020.10.13

블로흐: 미라보 백작 (1)

유복하게 생활하는 한 사내는 어느 날 비참할 정도로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때 어떤 상념이 사내의 뇌리를 스쳤다. 그의 걸음걸이는 자신의 걸음과 비슷하며, 어깨가 흔들리는 모습 또한 자신의 것과 유사했다. 심지어 얼굴의 생김새도 거의 동일했다. 이순간 사내는 어떤 착각에 사로잡힌다. 어쩌면 그 남자의 모든 것이 나의 육체이며, 나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 어떤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삶이 꼬이지 않았더라면, 그는 마치 내 동생처럼 편히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황당한 사건은 주어지지 않았다. 우연히 주위에서 피리소리가 들린다 하더라도 남자는 몸을 비비꼬며 춤춘 적도 없었다. 불쌍한 그 남자는 -흔히 선한 사람들이 말대로 오로지 인간적으로 고..

28 Bloch 흔적들 2020.10.13

블로흐: 이별의 모티프 (5)

화가는 당혹스러운 감정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미의 놀라운 말들이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화가는 사랑의 유희에 수동적으로 따르기로 작심했다. 그는 자정이 지나치고 다음 날이 온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일순간 들판 위에서 돌풍이 일었다. 희미한 달빛은 창백하게 유동하는 안개 속에서 명멸하고 있었다. 멀리 마을 회관의 창문에서 자그마한 빛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불어오는 즐거운 바람은 관현악의 힘찬 음과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어쩌면 게르트루트는 그곳 문 앞에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미는 자신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다시 오래된 교회의 탑으로부터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종소리는 바람과 부딪치며, 더욱더 격렬한 굉음으로..

28 Bloch 흔적들 2020.09.08

블로흐: 이별의 모티프 (4)

근처에 위치한 교회의 탑으로부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오전에 들을 바 있었던, 바로 그 찢어지는 비명의 종소리였다. 게르트루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슬픔에 잠겨서는 안 됩니다. 당신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순수한 음을 듣지 않았나요? 즐거운 마음으로 춤추러 가야해요. 하루의 만남이 이제 끝나가는군요. 저녁시간 내내 내 곁에 머물겠다고 약속해주세요. 당신이 나를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 산책할 수 있었군요, 이 점에 대해 주님에게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아마도 아직 나를 저버리지 않은 것 같아요.” 처녀는 황급히 화가의 손을 잡고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뒤이어 친숙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왔다. 마을 회관에는 여러 개의 횃불이 꿈틀거리며 타오르고 있..

28 Bloch 흔적들 2020.09.08

블로흐: 이별의 모티프 (3)

식사가 끝날 무렵에 촌장은 직접 담구어 절반 정도 발효시킨 포도주를 가지고 왔다. 이때 어느 농촌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게르멜스하우젠의 즐거운 삶에 관한 노래였다. 촌장이 관악기 하나를 가지고 와서 연주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환호를 외치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화가는 게르트루트에게 춤을 청했다. 처녀의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은 방의 이곳저곳을 춤 추면서 돌아다녔다. 화가는 처녀의 우아함과 미모에 거의 넋이 나가 있었고,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거대한 행복감에 이리저리 이끌리고 있었다. 게르트루트는 화가를 쳐다보면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일순간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촌장은 사람들의 춤을 중단시키고, 창밖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마침 장..

28 Bloch 흔적들 2020.09.08

블로흐: 이별의 모티프 (2)

처녀는 자작나무 옆으로 뻗어있는 좁은 들판 길로 향하려고 등을 돌렸다. 이 순간 처녀에게서 어떤 기이한 놀라움 그리고 우아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화가는 처녀의 곁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하인리히가 당신의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가요? 당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인가요?” 처녀는 순간적으로 탄식하면서 절망적으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는 내게로 도저히 올 수 없을지 몰라요. 병들었는지, 아니면 사망했을지도. 난 너무 불행해요, 아저씨. 혹시 비숍스로다의 길을 따라 오셨나요? 도중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요? 그의 이름은 하인리히 볼구트라고 합니다. 엉겁결에 들은 말인데, 읍장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어느새 낮이 많이 짧아졌네요. 오늘은 더 이상 그와 재회할 수 없을 것 같네요.” 화가..

28 Bloch 흔적들 2020.09.08

블로흐: 이별의 모티프 (1)

어느 젊은 화가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미 오래 전에 스친 기억을 떠올리고 공허한 과거의 지평을 추적해나간다. 과거의 지평 속에는 화가가 겪은 모든 체험이 정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우연히 만난 처녀에 대한 연정은 그에게 오랫동안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미에 대한 사랑은 비록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치 맨 처음 부끄럽게 만개하려 하다가 그만 시들어버린 꽃봉오리와 같은 무엇이었다. 아마 이보다도 더 아름다운 이별의 이야기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래, 화가는 아름다운 이별을 정확히 서술하면서 우울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심리적 상처로 인해 마음 아파한다. 그렇지만 그의 갈망은 절반 정도 충족되어 이후에 예술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화가는 신선한 기운을 지닌 채 어디론가 혼자 여행을 떠난다. 아름다..

28 Bloch 흔적들 2020.09.08

블로흐: 방해하는 망상

사내는 어둠 속에 서성거리면서, 대체로 자기 자신을 성찰하거나 거울에 비춰보지 않는다. 사내는 컨베이어 시스템 옆에서 하루 여덟 시간 일한다. 말하자면 동일한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마치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처럼 거의 실종 상태에서 일하는 셈이다. 사내는 아주 아름다운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50대의 그 사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바로 그곳에 다른 사내가 나타나서, 자신이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내는 가난하게 살아왔으며, 많은 분야에서 무산계급과 함께 노동에 임했다고 한다. 인품의 측면에서 사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개심 없은 얼굴에는 여전히 슬픔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시민 주체 속에는 부르주아가 숨어 있어.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동지들 사이..

28 Bloch 흔적들 2020.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