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신의 모습은 어떤 당혹스러운 오류에 휩싸이는 순간에 더 생생하게 인지될 수 있다. 어느 신사는 밤늦게 친구들과 함께 어느 호텔에 당도했다. 모든 침대는 이미 다른 숙박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방 하나가 빈다고 했다. 그러나 방안의 침대에는 흑인 남자 한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이곳은 아메리카야, 하고 누군가 말했다.
객실 하나에 여러 사람이 취침해야 하는데도 신사는 방값을 지불했다. 어차피 하룻밤 묵을 수밖에 없었고,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호텔 하인에게 문가에서 취침하게 될 자신을 아침 일찍 깨워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침대에는 흑인이 곤히 잠자고 있으니, 그를 일부러 깨우지 말라는 부탁을 빠뜨리지 않았다.
호텔 종업원과 신사의 친구들은 그 혼자 깨우기 위한 방도를 고심하다가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신사의 얼굴에 검은 표시를 남기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 전체를 검게 칠했을 때도 신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 하인이 그를 깨웠을 때, 신사는 황급히 가방을 챙겨서 역으로 달려가 기차에 올랐다. 뒤이어 객실 세면장에서 얼굴을 씻으려고 했다. 그런데 거울 속에서 검은 사내가 비치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놀라서 신사는 퉁명스럽게 외쳤다. “아니, 멍청한 녀석이 하필이면 니그로를 깨우다니!”
이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서술하더라도 동일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신사는 늦잠을 자게 될까?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간만큼 신사가 정신이 말똥말똥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모습을 가까이 바라보았을 때 불명료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일상화된 하얀 피부 색깔이 마치 통상적으로 편안하게 걸쳐 입었던 의복처럼 자신의 몸에서 일순 일탈되는 것 같았다.
하얀 피부 또한 대부분의 경우 얼마든지 일그러진 왜곡된 상과 유사하게 비칠 수 있었다. 거울 속에는 아무 것도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생명 차체가 마치 서툰 재단사에 의해서 짜깁기한 것처럼 여겨졌다. 물론 자신의 옷이 벗겨져 아래로 떨어질 때 깨어난 흑인은 날카롭게 눈을 깜박거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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