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홍성란: 소풍

필자 (匹子) 2016. 4. 29. 15:40

 

시조 한 편을 소개하고, 서로박 샘이 당신을 위해서 해설을 달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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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홍성란

 

 

여기서 저만치가 인생이다 저만치,

 

비탈 아래 가는 버스

멀리 환한

복사꽃

 

꽃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곁에 자는 봉분 하나

 

(시조집: 바람의 머리카락, 고요아침에서)

 

 

 

 

 

생 (生)이 그저 아름다운 소풍으로 이어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삶은 그렇게 녹녹치 않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리라. 옛날 같으면 삼시세끼 걸르지 않는 것도 힘들었다고. 대부분 무지렁이로 태어나 빈손으로 무언가 움직이며 일해야 그저 밥 한 그릇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요즈음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금수저는 드물고, 흙수저는 많다. 그렇지만 요즈음이라고 해서 살아가는 게 쉽지는 않다. 끼니 걱정은 아니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에게 욕 먹지 않고, 자존심 상처 받지 않고 살아가기란 너무나 힘이 드니까 말이다. 최소한의 스트레스라도 받지 않으면 생은 얼마나 편안하랴.

 

살아가면서 지나간 세월을 반추해 본다.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힘들게 살아왔는데, 돌이켜보면 인생은 일장춘몽 같아 보인다. 그래, 여기서 저만치가 인생이다 저만치. 이왕이면 과거를 생각하며 앞으로 살아갈 나날도 계획해 보는 게 어때? 그게 낫겠지? 앞으로 남은 인생이 마치 소풍처럼 즐겁고 아름답게 지나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치면, 하루하루가 소풍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소풍의 설렘은 자주 느끼지 못한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니까. 사랑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몸이 잘 말을 듣지 않는다. 40대가 지나면 우리의 인생은 마치 내리막길처럼 보인다.  비탈 아래 가는 버스 - 버스를 타든, 걸어가든 비탈길을 내려가는 것은 수월하지만, 몹시 위험한 일이다.

 

교통 사고는 오르막길 보다는 내리막길에서 자주 발생한다. 몹시 애호하는 친구가 중병에 걸려 입원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이제 삶에서 더 이상 행복한 즐거움은 더 이상 자주 출현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환하게 피어 있는 복사꽃이 버스를 스쳐 지나간다. 언젠가 젊은 시절 그렇게 애틋하게 사랑하던 임을 만났지. 지금 그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초등학교 짝궁이었던 그미는 누구와 살고 몇명의 아이를 낳았을끼? 멀리 환한 복사꽃이 우리의 과거를 떠올리게 해준다.

 

대부분의 꽃은 봄과 여름에 피지만, 꽃은 젊음을 떠올리게 한다. 꽃은 사랑의 결실을 낳게 하니까. 그렇기에 꽃은 무덤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전해준다. 생명을 지닌 피조물 치고 꽃을 사랑하지 않는 자 있을까? 그러나 사랑의 묘약을 마음껏 맛본 늙은 생명체는 이제 쓸쓸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늙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쓸쓰함을 안겨주고, 과거의 찬란한 축복과 희열의 순간을 떠올리게 해준다. 누가 말했던가, "모든 동물은 교접 후에 쓸쓸함을 느낀다."고? 왜 쓸쓸함을 느낄까? 에로스의 뒷 면은 타나토스이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죽음은 살아있는 자의 마음과는 다르다. 죽은 자는 살아있는 늙은이의 심경을 알지 못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생명 없음은 그 자체 기억 없음이다. 시신은 죽은 자의 영혼이 빠져나간 번데기 껍질이다. 무덤 속의 망자는 희로애락애오욕을 알지 못하며 그냥 누워 있을 뿐이다. 다석 류영모의 표현에 의하면 얼나가 아니라, 그저 생명을 빼앗긴 몸나일 뿐이다. 죽어 있는 인간의 몸은 무겁기 이를데 없는 가죽 부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봉분 하나는 아무런 느낌 없이 쿨쿨 잠만 자고 있다. 분홍빛 복사꽃들이 이다지도 나의 애간장을 녹이는데......

 

나는 홍성란 시인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시조 "소풍" 한 편으로 홍성란 시인은 시인의 역할을 다 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시는 인생의 후반기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명시라고 해서 반드시 화려하고 수식이 많아야 하는 법은 없다. 요약하건대 홍 시인은 짤막한 시구 한 편으로써 인생의 장년기의 우울과 순간적 즐거움을 모조리 만끽하게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