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박태일의 시 "레닌의 외투"

필자 (匹子) 2020. 1. 21. 09:11

아침 저녁 오갈 때마다
혹 당신일까 길 건너로 지나치다
울란바타르에 머문 셋째 주인 오늘
울란바타르호텔 앞에 선 당신을 처음 만난다
옆구리에 무거운 외투를 낀 채
익은 듯했던 모습은 동상 앞쪽에 새긴 레닌
레닌 막 배우기 시작한 몽골어로 확인하며
나는 눈인사를 보낸다 레닌
당신보다 먼저 알았던 동지 카우츠키
1970년대 초반 어린 대학생 시절 나에게
그의 책 계급투쟁 복사본을 건네주었던 친구는
서독으로 흘러가 동독 문학을 배우고
독일인 아내와 돌아왔지만 그가
처음 말아주었던 대마초 매운 연기처럼
울란바타르 겨울 공기는 낮고 어둡다
그 카우츠키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잊었고
또 당신이 어떻게 그를 다루었는지 희미하지만
징키스한과 자무하가 뿌린 넓은 땅
울란바타르 붉은 영웅의 도시에
영웅으로 와서 오래 즐거웠을 당신
잿빛 걸음을 공중에 묶어둔 채
아직도 몽골 정부청사 건너 쪽
그보다 더 큰 대사관으로 남은 조국 러시아와 함께
당신 또한 울란바타르 많은 동상 가운데서
우뚝 높은 모습으로 지쳐 있는가
조국에서조차 허물어져 내린 당신을
70년이나 머물렀던 당신을 그냥 둔
몽골 사람들 깊은 속을 알 순 없으나
어릴 적 혼자 앓다 낳던 생인손처럼
이 많은 사람 속에 당신은 문득 잊혀진 사람이던가
어느덧 당신이나 나나 고향을 두고 온 사람
나는 기껏 종갓집 갓김치와 진간장을 사기 위해
해발 1350미터 거리 여기저기
상점을 기웃거리는 좀스런 사람이 되었고
어지러웠을 혁명의 갈피마냥 촘촘하게
둘레 산마루까지 올라붙은 판자 판잣집들
3억 원짜리 아파트와 무상의 땅 밑 맨홀집이
중앙난방 한 온수로 함께 따뜻한 이 곳
너무 멀리 맑은 초원과 하늘
너무 뚜렷한 삶의 위아래
두 세상 끝을 한 품에 안고도
아침이면 모두 평등하게 일어나는 도시
그것을 밤낮없이 눈뜬 채 지켰을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홀로 입술 다물고 선 당신이
한 시절 돌보지 못했던 내 청춘 같고
1970년대 흩어진 사랑 같아 쓸쓸하기만 한데
낡은 전동버스는 흐르다가 서고 흐르다가 선다
거리전화 손에 든 사람들 전화기와 전화기 사이로
낯을 훑는 북국 바람은 무더기로 밀려와도
당신은 한결같이 평안하신가
안녕 레닌
안녕 안녕 레닌
오가는 이 끊긴 울란바타르호텔 앞
차를 닦는 아주머니나 손을 기다리는 기사들 눈길조차 주지 않는 쌈지공원
무엇을 위해 덩그러니 당신 그리고 나는 서서
엘지 스카이텔 광고판과 그 너머
2250미터 높고 긴 복드한산을 바라보고 있는가
몽골보다 먼 북쪽 나라
러시아에서 온 당신을 만나
몽골 사람보다 더 가까운 듯싶은 이 느낌이 서글퍼서
나는 또 혀끝으로 입천장으로 웅얼거린다
안녕 레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