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필자 (匹子) 2018. 3. 31. 12:05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1777 - 1811)는 장 파울, 프리드리히 횔덜린과 함께 독일의 반고전주의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굴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천재의 눈은 영리함을 보여줍니다. 악동의 뺨 그리고 둥근 얼굴은 그가 얼마나 충동적인 착상에 사로잡혀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줍니다. 열정과 격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코 - 그의 얼굴은 자신의 악동의 극한적 특성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성과 충동성은 자신의 문학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클라이스트의 집안은 폼메른 지방의 귀족으로서 수많은 장성, 학자, 외교관 등을 배출하였습니다.

 

 

 

 

이것은 클라이스트 집안의 문장 (Wappen, 紋章)입니다. 클라이스트는 가족의 풍습대로 군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1799년 그는 군대의 교육에 싫증을 느끼고, 가족들이 원하는 돈, 지위 그리고 명예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에게 가치 있는 것이란 다름 아니라 교양을 쌓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음의 자료는 프랑스 혁명과 작가에 관한 것입니다.

 

 

괴테 실러 횔덜린 클라이스트
42
(1747 1832)
30
(1759 1805)
19
(1770 1843)
12
(1777 1811)
귀족적 개인주의 이상적 자유주의
나이 어려서 잘 모름
주어진 현실에 거리감을 취함. 실제 혁명 민초들의 삶에 등한시함 혁명에 동조함 혁명의 여파에 실망함.
혁명적 슬로건: 시정잡배들의 아우성 자연법 + 전통적 보수주의

혁명 예찬

혁명의 반동적 변모에 증오함.
고매한 회색분자? 폭정에 반대, 선한 왕을 추구함, 자유의 정신을 추상적으로 갈구함. 광증: 미쳤는가. 미친 척 했는가? 파리 체험, 실망, 괴테를 뛰어넘으려는 욕구 -> 권총 자살

 

 

 

 

왼쪽의 초상화는 클라이스트의 약혼자 빌헬르미네 폰 쳉게라는 여성입니다. 오른쪽의 그것은 울리케 폰 클라이스트의 초상화입니다. 울리케는 하인리히와 많이 닮았습니다. 클라이스트는 처음에는 군대에 들어갔으나, 이곳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1799년 4월부터 오더 강가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예술사 그리고 라틴어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다 다시 중도 포기합니다. 하인리히는 1800년 위의 여성과 약혼하였으나, 사촌 누이인 울리케와 함께 도주하였습니다.

 그후 울리케는 하인리히가 경제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고통을 느낄 때 언제나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인리히가 죽은 뒤에 울리케는 혼자 결혼하지 않고 살아갔다고 합니다.

 

 

 

이곳은 오더 강가의 프랑크푸르트입니다. 독일에는 프랑크푸르트가 두 곳이 있습니다. 국제공항이 있는 마인 강가의 프랑크푸르트가 잘 알려져 있지만, 오더 강가의 프랑크푸르트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곳은 동쪽 독일 지역에 위치합니다. 고유명사 가운데에서 "푸르트

Furt"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곳은 마차들이 쉬어가는 곳으로서 언제나 강을 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들이 모여서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드레스덴에 있는 클라이스트의 동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클라이스트는 문학적인 성공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파리에 체류하였으며, 1804년에서 1807년 사이에는 쾨니히스베르크에 머물렀습니다. 돈이 없으면 울리케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청하곤 하였습니다. 1809년부터 1811년까지 그는 베를린에서 살았습니다.

 

 

 

 

클라이스트는 자기 자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휘장 없는 장교, 작품 없는 작가 그리고 직업 없는 사내." 그는 문학적 성공을 위해서 부단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외면, 혹평 그리고 냉대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살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니, 세상이 그의 목숨을 스스로 끊게 한 것이었습니다. 1811년 11월 21일 클라이스트는 누이인 울리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더 이상 살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무심결에 알게 된 약간 정신 나간 여자 헨리에테 포겔과 함께 베를린 근교에서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는 것을 분명히 전합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시신으로 장례를 치르지 말고, 헨리에테 포겔과 함께 어딘가에 묻어달라고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어느 여성과 자살한 베를린 근교의 반제의 모습입니다. 여름이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 클라이스트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클라이스트의 시신은 베를린 반제 호수가에 묻혔습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비석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 의하면 자살한 자는 매장 (埋葬), 다시 말해서 땅속에 시신을 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사람들은 그의 비석을 새롭게 단장하여 가꾸었습니다.

 

클라이스트의 극작품들

 

로베르 기스카르1803 원고를 불태움
슈로펜슈타인 가 ()1803 가명. Graz 1804 (반응 없음)
깨어진 항아리1803/ 1806 바이마르 1808. 괴테의 혹평
암피트리온1808 사후: 베를린 1899 초연
헤르만 전쟁1808/ 11 사후: 브레슬라우 초연 1860
펜테질레아1808 사후: 베를린 1876
하일브론의 케트헨」1807/08 1810 (별 반응이 없음)
홈부르크 왕자1809/ 1811 1821

 

 

 

 

 

"깨어진 항아리"의 한 장면. 아담은 재판관으로서 루프레히트의 약혼녀 이브에게 눈독을 들입니다. 그래서 약혼남 루프레히트를 군대에 입대시켜서 멀리 인도네시아로 보내려고 합니다. 밤에 아담은 이브의 방으로 뛰어들어서 그미를 겁탈하려고 합니다. 이때 항아리가 깨어지고 아담은 도망칩니다. 집주인은 항아리를 깨뜨린 용의자로 루프레히트를 지목합니다. 아담은 이브를 협박하여, 모든 것을 밝히면, 약혼남을 멀리 보내겠다고 협박합니다. 재판이 열리면 아담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우려고 합니다. 진리는 아담에 의하면 반드시 은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발설하는 자는 결국 이브입니다.

 

 

 

 

연극 펜테질레아의 한 장면. 펜테질레아는 아킬레스를 사랑하지만, 무력으로 꺾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마존 국가의 법에 의하면 여전사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은 사내와 정을 통하여 자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아킬레스가 그미에게 일부러 져줍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는 펜테질레아와 사랑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ㅍㄴ테질레아는 사랑이냐, 국가의 안녕이냐를 놓고 고민합니다. 모순된 정황 속에서 승리와 극한의 사랑을 동시에 추구하는 펜테질리아는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클라이스트의 산문 명작들

칠레의 지진 1810년 발표.
우연, 행복과 불행
O 후작부인 1810,
가부장주의, 여성, 사랑
미하엘 콜하스 1808년 발표 정의
, 전쟁
산토 도밍고의 약혼 1810년 발표,
권력욕, 우연

 

 

 

 

 

 

사진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의 박물관의 전경입니다. 위대한 극작가는 생전에는 고독, 가난 그리고 사회적 냉대 속에서 살았습니다. "깨어진 항아리"가 바이마르에서 공연되었을 때, 괴테는 클라이스트의 극작품을 혹평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고전주의는 건강하고, 낭만주의는 병적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 이후로 클라이스트는 미쳐버린 낭만주의자이다라는  비난을 오랫동안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수정됩니다. 괴르케의 그림으로 표현된 미하엘 콜하스의 결말부분. 말 한 마리의 소유권을 따지는 미하엘의 노력은 거대한 전쟁을 감수해야 합니다. 미하엘 콜하스는 말을 파는 말장수였습니다. 그의 튼실하고 멋진 말이 어느 다른 사람의 교활한 술수에 의해 바꿔치기 당했을 때, 콜하스는 불의에 대해 몹시 분개합니다. 부정과 불합리한 거래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튼실한 말을 찾기 위한 끝없는 노력은 결국 전쟁에 참가하게 만듭니다. 주인공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미하엘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클라이스트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836년에 공연된 "케트헨 폰 하일브론"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은 처음으로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자신이야 말로 그에게 숙명적인 반려라고 생각합니다. 케트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남자를 사랑합니다. 이로써 자신의 사랑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클라이스트는 사랑의 감정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한 여성의 맹목성, 과단성 등을 예리하게 투시하고 있습니다. 

 

 

 

클라이스트의 마지막 작품 "홈부르크 왕자"의 한 장면. 자신의 개인적 의지와 국가의 필연적 명령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다가 홈부르크 왕자는 끝내 좌절을 맛보아야 합니다. 요약하겠습니다. 클라이스트의 문학은 정치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클라이스트의 문학에서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주제를 도충해내려고 시도하는 반면에, 혹자는 클라이스트의 작품에서 낭만주의의 퇴폐성을 발견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깨어진 항아리, 미하엘 콜하스 등의 작품은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의미를 가져다주는 반면에, 홈부르크 왕자, 슈로펜슈타인 가 등은 진리를 찾으려는 모든 노력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동적이고 사악한 냉소주의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의 문학을 어떠한 관점에서 고찰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클라이스트의 문장:

 

1. Das Leben, welches wir von unseren Eltern empfingen, ist ein heiliges Unterpfand, das wir unsern Kindern wieder mitteilen sollen. 부모로부터 수용한 삶은 성스러운 저당물로서,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에게 계속 전해주어야 하는 무엇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클라이스트가 얼마나 부모에 대해 부담감을 지녔는가? 하는 사항을 접할 수 있습니다.)

 

2.Dem Durstigen kommt es, als solchem, auf die Schale nicht an, sondern auf die Früchte, die man ihm darin bringt. 갈등을 느끼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물이 담긴 그릇이 아니라, 그에게 전해지는 (물과 같은) 결실일 것입니다.

 

 

 

 

 

 

3.

Einen Lehrer gibt es, wenn wir ihn verstehen; es ist die Natur.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이지요.

 

4.

Erfülle deine Pflicht; und dieser Satz enthält die Lehren aller Religionen.

너의 의무를 다하라. 이 문장이야 말로 모든 종교가 제시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의 권위에 대한 클라이스트의 은근한 비판을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