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에리히 케스트너

필자 (匹子) 2018. 3. 9. 11:45

 

한 인간이 자신의 이름, 직업 그리고 생활 환경을 완전히 벗어나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에리히 케스트너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서 이러한 역할 놀이를 즐겼습니다. 청년 문학을 논할 때 우리는 에리히 케스트너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에리히 케스트너 (1899 - 1974)는 독일 작가로서 청소년 문학에 기여한 바 큽니다. 가령 "에밀과 탐정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장영은 교수에 의해서 번역되어 2000년에 한국어판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케스트너는 소설 외에도 재미있는 풍자의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에리히 케스트너는 1899년 드레스덴에서 안장 제작자 내지 피혁 공장을 경영하는 아버지와 미용사로 일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간 것도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지독한 마마보이의 작가로서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를 들 수 있습니다. 생텍쥐페리는 "어머님이 원하시면 결혼하지요."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지만, 너무 사랑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케스트너 연구자의 주장에 의하면 그의 친아버지가 유대인 의사로서 조우했던 에밀 침머만Emil Zimmermann (1864–1953)이라고 합니다.

 

 

사진은 1920년대에 자리했던 드레스덴의 학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학교의 이름은 

Freiherrlich von Fletchersche Lehrerseminar니다. 케스트너는 1913년부터 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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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불과 18세의 나이에 케스트너는 군에 징집되어서 포병 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이때 체험한 군대의 경험은 참으로 끔찍한 것으로서 평생 그의 기억 속에 하나의 끔찍한 상흔으로 각인되었습니다. 그가 반전부의자가 된 것은 이러한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케스트너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역사, 철학, 독문학 그리고 연극학 등을 공부하였습니다. (독일 대학생들은 제 1전공 하나 그리고 제 2전공 두 개를 공부합니다. 그래야 학문적 편협함을 떨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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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케스트너는 "프리드리히 대제와 독일 문학"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이로써 그는 라이프치히 신문에 글을 기고하여 원고료를 받습니다. 1927년 케스트너는 거주지를 베를린으로 옮깁니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케스트너는 많은 소설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파비안"도 있습니다.Bildergebnis für fabian kästner
사진은 파비안의 연극 공연의 장면입니다. 주인공 파비안은 독문학자로서 광고 텍스트를 작성하면서 생계를 이어갑니다. 그는 수수방관자로서 베를린의 야밤을 관찰합니다. 사람들은 술집에서, 홍등가에서 혹은 예술가의 살롱에서 활기 넘치게 생활합니다. 파비안은 공산주의자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자들 모두에게 실망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부도덕하게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친구 라부데가 있습니다. 그 친구 역시 인간이 도덕적으로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여자친구에게 배신당하고, 깊은 상처를 입게 된 라부데는 가볍게 만나는 여자들과 흥청망청 살을 섞으면서 지냅니다. 라부데는 어느 날 자살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교수자격 논문이 통과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이 절망했던 것입니다. 사실인즉 논문을 심사하는 조교수는 라부데의 논문이 너무나 훌륭하여 농담 삼아 그런 식으로 말했는데, 라부데는 곡해하여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입니다. Bildergebnis für fabian kaestner
사진은 극작품으로 각색되어 공연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비안은 어느 날 코르넬리아 바텐베르크라는 여자를 만납니다. 그미는 자신의 몸만 탐하려는 남자들에게 실망하여 독신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파비안은 코르넬리아에게 이끌립니다. 주인공은 처음으로 주위의 한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연인 관계를 맺는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코르넬리아가 영화사 사장과 묘한 사랑을 나누게 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경력을 위해서 파비안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그미는 영화사 사장에게 빠져든 것이었습니다. 파비안은 그미에게 실망하여 베를린에서의 삶을 접고 고향인 드레스덴으로 돌아갑니다. 베를린은 도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려는 한 인간에게 자발적인 사랑의 삶을 실천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작품 파비안은 많은 찬사를 받게 됩니다. 심지어 신즉물주의 Neue Sachlichkeit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인정 받습니다. 그러나 나치는 나중에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이 작품을 불태웠습니다.   



혹시 페비언주의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요? 미리 말씀드리면 페비언주의와 소설 파비안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페비언주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영국, 뉴질랜드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 퍼진 사회주의 모임을 가리키는 것이며, 파비안은 케스트너 작품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수수방관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무기력함을 무엇보다도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케스트너의 "파비안"입니다.Bildergebnis für innere emigration
에리히 케스트너는 히틀러의 집권 당시에 독일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내적 망명 Innere Emigration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게슈타포로부터 문초를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라를 떠나지 않고 베를린 등지에서 칩거하면서 살았습니다.

 

1948년 11월 18일 괴팅겐에서 독일 펜클럽을 결성하기 위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케스트너는 여기에 참석했습니다. 맨 오른쪽이 에리히 케스트너입니다. 케스트너는 청소년 문학 작품, 시나리오 등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에리히 케스트너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에게 연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반려자 Lebensgefährtin인 프리델 지베르트가 1957년 아들 토마스를 낳았을 때 세 사람은 1969년까지 함께 살았습니다. 아이를 가지면 무조건 혼인 신고를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한에서도 미혼모는 자식을 출생신고할 수 있습니다. 2015년 대법원은 "사랑이법"을 공표했는데, 이에 의하면 미혼부도 자식을 출생신고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드레스덴에 위치한 에리히 케스트너의 박물관입니다. 작가는 현세에서 비난당하고 망각된 채 살아가지만, 죽어서 이름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