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헤르만 헤세

필자 (匹子) 2018. 3. 16. 13:21

 

 

 

 

헤르만 헤세 (1877 - 1962)는 동양의 정서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을 많이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토마스만처럼 순수한 독일의 정신을 고취시킨 작가는 아니었지만, 후세에게 영혼의 안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적 고통을 문학을 통해서 스스로 치유하려고 했습니다. 헤세는 문학이 인간에게 얼마나 마음속 깊은 위안을 가져다주는가?를 증명해내었습니다.

 

 

 

사진은 헤세의 생가를 보여줍니다. 독일 뷔르템베르크의 도시 칼프에 위치하고 있는 헤세의 생가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학교 수업을 매우 힘들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성들은 약 100년 전부터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이전에 여성들은 몇몇 예외적 사항을 제외하면 대학 문턱을 밟을 수 없었다. 1997년 빈 대학교는 여성 대학교육 100주년을 기념하여 플라카트를 만들었다.

 

 

라틴어의 힘든 규칙을 감수성 많은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분위기, 자발적이고 유연한 아이들의 마음속에 딱딱한 규율과 규칙을 강요하는 학교 때문에 헤르만 헤세는 학교 다니는 것을 하나의 고통으로 여겼습니다.

 

 

 

이 사진은 헤세가 태어난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2003년의 사진이므로 옛날에는 이와 달랐습니다. 보이는 다리는 니콜라우스다리이며, 멀리 니콜라우스 예베당이 보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표현력이 강한 아이였습니다. 어린 시절 신학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수천권의 장서를 부러워하였습니다. 10대의 나이에 독서를 좋아했지만, 창작에 뜻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헤세는 여러 학교를 전전해야 했습니다. 1881년에는 스위스의 바젤로, 1885년에는 다시 독일의 괴핑겐의 학교로 전학했습니다. 사진은 마울브론 신학교의 모습입니다. 헤세는 이곳에서 공부하다가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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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헤세는 부모와의 갈등으로 깊은 우울증에 빠집니다. 그는 스스로 버림받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야훼, 부모 그리고 학교는 그를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하고, 망각의 심연 속으로 파묻는 것과 같았습니다. 자살 충동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1982년 5월 헤세는 피스톨을 구해서 자살을 시도합니다. 죽지 않고 다시 깨어납니다.  

 

 

헤세는 1894년부터 1년 간 여러 일을 전전한 다음에 튀빙겐에서 도서 판매를 위한 견습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읽기와 쓰기 - 그것은 헝클려 있던 그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촉매 역할을 담당합니다. 아니, 문학은 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며, 치료의 매개체가 됩니다. 아무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헤세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서 삶의 위안을 찾게 됩니다. 책읽기는 그에게 학교 수업이었으며, 글쓰기는 자신의 마음속을 드러낼 수 있는 창문 바깥을 바라보는 행동, 그 이상이었습니다. 사진은 튀빙겐에 있는 서점을 가리킵니다. 이곳에서 헤세는 도서 판매의 직원으로 생활하면서, 수많은 책들을 읽어내려 갑니다.

 

 

 

 

사진은 헤세의 첫 부인인 마리아 베르누이 (Maria Bernoulli, 1868 - 1963)을 가리킵니다. 그미는 헤세보다 9살 연상의 여인으로서 바젤에서 사진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903년에 헤세는 그미와 결혼합니다. 결혼을 통하여 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미는 처음에는 밝고 내향적인 여인이었는데, 서서히 헤세와 갈등을 겪습니다. 헤세는 여행을 좋아하고, 책 읽기 독서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마리아 베르누이는 서서히 우울증에 가라앉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19년에 이르러 도저히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집니다. 1923년 헤세는 그미와 이혼합니다. 

 

페터 카멘친트 1904
수레바퀴 아래에서 1906
로스할데 1914
데미안 1919
싯다르타 1922
황야의 이리 1927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1930
유리알 유희 (1947년 노벨상 수상작) 1943

 

위의 도표는 헤세의 소설의 제목입니다. 헤세는 동양사상과 관조를 문학 작품 속에 반영하였습니다. 위의 소설들은 한국에도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진은 가이엔 호펜에 위치한 헤세의 집이었습니다. 1913년 인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헤르만 헤세는 이 집을 구입하여 가족과 거주하였습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스위스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헤세는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몹시 불행했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세살 난 아들 마르틴이 유명을 달리 했으며, 아내인 마리아가 정신 병원에 입원햇던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문학이라는 영역 속으로 자신을 감추면서 모든 개인적 사회적 아픔을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사진은 스위스의 테신이라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테신 지역은 스위스의 남쪽 지방을 가리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탈리아 언어를 사용합니다. 호수의 정경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테신 지역의 사람들은 포도주 생산 그리고 관광 등으로 먹고 삽니다. 헤르만 헤세는 1919년 이곳으로 이주하여 1962년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헤세는 1923년 마리아 베르누이와 이혼하였습니다. 아내의 정신병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소프라노 가수인 루트 벵거 (1897 - 1994)를 사귀게 됩니다. 그미는 스위스의 소프라노 가수였고, 이따금 그림을 그리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사이가 각별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격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헤세는 조용히 글을 쓰거나 혼자 여행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루트는 혼자 있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미는 여러 마리의 개를 키웠는데, 헤세는 동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1924년에 시작되었는데, 3년이 지나 이혼으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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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문학은 도를 찾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경제적 생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영혼의 안식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고통과 우울 그리고 불안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요? 헤르만 헤세는 이에 대한 해답을 동양사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가 싯다르타에 관한 이야기로 한 권의 장편을 창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헤르만 헤세의 문학은 유럽과 북미에서의 히피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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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음악 아티스트 산타나 Santana 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룹의 리드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팀원들은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아브락사스"라는 앨범을 간행했습니다. 다음을 클릭하면  산타나의 아브락사스 앨범에 실린 검은 마법의 여인 Black magic Woman 을 들을 수 있습니다. (5분 34초)

https://www.youtube.com/watch?v=wyQUCYl-ocs

 

 

헤세의 발언 1. "인간은 가능한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서 불가능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2. "용기 있는 인간 그리고 강단 있는 인간은 타인들에게 참으로 섬뜩한 느낌을 준다."